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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한국인지, 열대지방인지

입력
2021.07.22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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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린 19일 서울 중구의 한 대형 빌딩 앞. 뉴시스

폭우가 내린 19일 서울 중구의 한 대형 빌딩 앞. 뉴시스


온다던 장맛비는 사라지고 햇볕만 쨍쨍하다. 점심을 먹으러 나설 때면 빌딩 사이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흰 구름을 만난다. 여기가 쿠알라룸푸르 한복판인가, 쌍둥이빌딩 위로 소나기구름이 떠올랐다. 맑을 거라던 하늘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거센 빗방울도 떨어진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그만 안녕. 검은 구름이 갈라지더니 투명한 햇살이 조명처럼 내리쬔다.

짧은 비가 갠 후 다시 번지는 후끈한 공기에서는 랑카위 해변 뒷길에서나 맡았던 진하고 축축한 열대의 냄새가 난다. 묻어놨던 여행의 순간들의 소환이다. 불현듯 쏟아지는 소나기만큼 열대다운 게 또 있을까? 하늘이 찢어져라 퍼붓는 빗줄기가 짙은 흙 냄새를 퍼트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멈추고 날개를 접었던 잠자리 떼가 날아오른다. 나에게 열대여행이란, 우두두둑 떨어지는 비를 피해 잠시 처마 밑에 서 있던 언젠가의 기억인 것이다.

작은 처마 아래에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까지 다 들어가진 못했다. 헬멧이라도 젖지 않게 간수할 수 있으면 다행.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은 지역을 다니는 여행자들에게 오토바이는 여러모로 유용한 수단이었는데, 하룻동안 가장 멀리 간 건 태국 치앙라이에서 골든 트라이앵글을 거쳐 미얀마 국경까지 넘은 일이었다.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 3개 국경이 동시에 만나는 황금의 삼각주, 불법 마약재배와 밀수로 한때 악명이 높았던 바로 그곳을 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종일 가는 길에 스콜을 만난 것만도 몇 번, 우비는 소용도 없었다. 오토바이에서 맞는 바람이 안 그래도 찬데 비에 젖은 옷을 입고 달리니 열대에서도 몸이 덜덜 떨렸다. 덥다며 반바지를 입고 호기롭게 나선 탓에 다리는 뜨거운 배기통에 홀랑 데였다. 그 길을 가기 전만 해도 이리 더운 나라에서 왜 다들 긴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지 몰랐다.

딱 그때처럼 잔뜩 달궈진 하늘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여기가 동남아네, 이제 열대 여행 갈 필요 없겠는데?” 친구에게 장난 섞인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이게 그냥 농담거리는 아니구나 흠칫 깨달았다. 도통 종잡을 수 없이 찾아오는 큰 빗소리를, 슬그머니 열대처럼 바뀌어버린 내 주변의 냄새를, 멀리 가지 않아도 동남아처럼 느끼게 만드는 낭만인 양 말할 순 없다.

가물수록 분홍색 물빛이 진해지는 터키의 명물 소금호수에는 가물다 못해 말라 비틀어진 바닥에 수천 마리 홍학의 시체만 즐비하다. 물을 다스린다고 으쓱하던 독일에서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집과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졌고, 미국과 캐나다는 더운 공기가 땅을 감싸는 열돔현상에 산불까지 겹쳤다. 태국에서 라오스로 미얀마로 국경을 넘을 땐 여권이라도 검사했지만, 무서운 비구름과 지글거리는 열기가 넘지 못할 국경은 없다. 기후변화 재앙이 전 지구적인 이유다.

지난 주말 막차를 기다리다가 급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피해 다들 정류장으로 몰려 섰다.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 도로에서는 차가 지날 때마다 물벼락이 치고, 조그만 우산 따위로는 버틸 수 없어 홀딱 젖어 가는데, 정류장 지붕 끝에서 거미 한 마리가 대롱대롱 분주했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비바람에 애써 쳐놓은 거미의 집도 망가져가고 있었다. 생존을 건 거미의 사투를 바라보며 우리 인간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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