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수거·택배 보관 등 '경비 외 업무' 규정
"초단기계약 따른 해고 불안 해소가 먼저" 불만
현장 숙원인 '감시단속직 제외' 지연도 성토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경비원의 업무 범위를 관련 법령에 명시하기로 했지만, 현장에선 경비원 처지를 개선하긴커녕 음성적으로 부과되던 경비 외 업무를 양성화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경비원 대다수가 하청업체와 초단기 고용계약을 맺는 현실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경비원이 온갖 허드렛일에 동원되는 상황을 막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 불안 여전한데… 허드렛일 양성화만"
1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토교통부는 9일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에는 경비원이 경비 업무 외에 △청소 등 환경 관리 △재활용품 분리 배출의 정리와 단속 △위험 및 도난 발생 방지를 위한 주차 관리 △택배 물품 보관 등을 수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를 통해 일부 경비원들이 일상적으로 떠맡던 대리 주차, 택배 배달 등의 업무는 원칙적으로 면제했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그러나 현장에선 정부 조치에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3~6개월짜리 근로계약서를 쓰고 상시 해고 가능성에 직면해 있는데,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업무 지시를 법령에 없는 일이라며 거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경기 안양시의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2년째 경비원으로 일하는 구모(69)씨는 "석 달에 한 번씩 사직서를 쓰고 하청업체와 새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며 "지금도 계약서상엔 경비 업무만 하는 것으로 적혀 있지만, 부당한 업무 지시에도 몇 달 뒤 해고될 걱정에 아무 소리도 못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시행령 개정으로 아파트 입주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경비원에게 가욋일을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동안은 경비원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경비원의 본업은 경비 업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제 이런 경계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경비원의 박봉이 더욱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될 거란 전망도 있다. 그간 가욋일에 지급되던 별도 수당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배 안양군포의왕과천 비정규직센터 자문위원은 "일부 아파트들은 재활용품 분리수거 수당으로 경비원에게 매달 5만원씩 지급하는데, 분리수거가 '합법화'되면 입주민들이 '돈 안 주고 시켜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 "경비원 입장에선 일은 늘어나고 수입을 줄어들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감시단속직 제외' 논의는 뒤로 밀려
현장에선 정부가 근로기준법상 경비원 지위를 변경하는 조치를 미루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현행법상 아파트 경비원은 보일러 기사, 전기 기사 등과 함께 '감시·단속적 근로자'로 분류돼 있다. 업무가 간헐적으로 이뤄져 상대적으로 대기 시간이 긴 근로자가 이 부류에 속하는데, 이들은 근로시간 제한, 휴게시간 보장 등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경비원 업무는 현실적으로 쉴 틈 없이 진행되는 만큼 '간헐적 업무'로 규정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민주노총 측은 정부와 이번 시행령 개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근로기준법 법령을 고쳐 아파트 경비원을 감시단속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함께 논의했지만 정부가 이행을 미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경비원 노조와 지속적으로 논의하면서 관련 지적을 충분히 수렴했으며, (근로기준법 주무 부서인) 고용노동부가 올해 10월 전에 경비원의 감시단속직 제외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경비원 처우의 근본적 개선이 갑질 문제 해소책이라고 지적한다. 신 위원은 "경비원을 일반 근로자로 재분류할 경우 인건비가 오른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폐쇄회로(CC)TV 증설, 야간 경비 축소 등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지자체 등이 예산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의헌 전국경비노동자사업단 대표는 "고용부가 나서서 경비원 지위를 보장하고, 지자체 역시 공동주택 규제를 활용해 경비원과 초단기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계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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