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여권 선두 대권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의 대표 브랜드가 되면서 집중포화의 대상이 됐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라는 비판이 잇따르지만 최근에는 기본소득의 이론적 찬성 논리를 펼치는 일부 전문가들도 눈에 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응할 필요성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불평등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책적 대안이 절실해진 까닭이다. 문제는 역시 재원이다. 재원 부족으로 기존 사회복지 체계가 위축될 수 있고,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가운데 기본소득 논의의 대표적 권위자인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SOAS) 교수의 최신 저서가 번역돼 나왔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 공동 창립자이자 BIEN 명예공동의장인 스탠딩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기본소득 이론과 실험의 전면에 나서 왔다.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있는 비정규직·파견직 등을 뜻하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계급 용어를 널리 알리며 기본소득을 이들을 구할 해법으로 강조했다.
그가 2019년에 펴낸 '공유지의 약탈'은 기본소득 재원 논의와 맞물려 있다. 책은 활발한 기본소득 논쟁에 비해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인 '공유지(the commons)'의 부활을 논한다. '커먼즈', '공통재' 등으로도 번역되는 공유지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공적 부(富)를 가리킨다. 현대에 들어서는 특허와 저작권, 사회 기반시설, 인터넷과 방송 전파 같은 무형 자산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저자는 영국 대처리즘(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경제개혁 정책)과 미국 레이거노믹스(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 속에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공유지의 상업적 개발·이용에 부과하는 부담금으로 공유지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을 공유지 배당으로 쓰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발생되는 배당금이 곧 소득·지출·가족관계 등과 상관없이 무조건 지급되는 정기적 지불금, 즉 기본소득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공유지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 의회 민주주의 시초로 꼽히는 1215년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소환한다. 무엇보다 마그나카르타와 함께 작성됐지만 오늘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삼림헌장'에 방점을 찍는다. 삼림헌장은 삶의 터전인 숲을 활용해 보통 사람들, 즉 공유자들(Commoner·커머너)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문서다. 왕에게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남용할 수 없는 의무를 부과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사회 소득의 필수적 부분이었던 공유지가 중세 후기의 인클로저(사유지 울타리 치기)를 필두로 상업화·사유화·방치되며 상실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영국의 경우 도시의 공공장소가 외국 부동산 개발업체와 금융자본에 매각되고 있고, 정부가 민간 자본을 유치해 병원 재단을 설립하면서 국민건강서비스(NHS)의 질은 떨어졌다. 노인 돌봄·우편·대중교통 등 공적 부문도 민영화하면서 취약계층의 불편이 커졌다. 개인 정보 영역도 국가가 아닌 페이스북·구글 등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의 수중에 넘어간 시대다.
저자는 이 같은 공유지 침탈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공유지 기금을 제안한다. 법·금융 인프라 사용, 탄소배출, 금융거래, 디지털 정보와 주파수 이용 등에 부담금을 부과해 기금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석유 자원에 기반한 미국 알래스카주(州)의 영구기금과 노르웨이 국부펀드를 모범 사례로 든다. 저자는 "기본소득이 기존 조세·급여 체제에서도 가능하다는 연구가 있지만 공유지 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존엄한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는 돈을 모으는 더 크고 나은 방법일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저자가 공유지 기금을 위한 잠재력이 크다고 판단한 분야는 정보 공유지다. 그는 "정보의 공유지 성격을 존중하는 좀 더 평등한 체제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업에 부담금을 부과하고 그 소득을 공유지 기금으로 보내 모두가 배당받게 하는 것"이라며 "기업이 개인 데이터를 이용하는 데서 나오는 모든 수입에 10%의 디지털 데이터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은 공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기본소득 재원 확보 방안으로 제시한 데이터세 주장과도 닮았다.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면 기본소득 논쟁도 더 심화할 수 있는 만큼 좌파 경제학자의 시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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