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범들, 영어·스페인어 구사... 중화기 무장까지
아이티 당국 "외국인 용병, 훈련된 특공대의 범행"?
혼돈의 아이티, 정치불안·치안공백에 '통제 불능'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이 7일 새벽(현지시간) 암살된 사건을 둘러싸고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는 대통령 사저를 무장괴한이 뚫고 들어가 현직 대통령을 살해한,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부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혔을 뿐, 현재로선 용의자의 구체적 신원과 배후 세력, 암살 의도 등 거의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다. 고도로 훈련된 전문 범죄 집단의 소행일 가능성, 이들 중 일부는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 정황만 드러났다. “외국 용병의 소행”이라는 아이티 관료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국제사회에 미칠 파장도 클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극심한 정치 불안과 기아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티가 혼돈의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용의자 체포·잔당 추적 중… 외국 용병 소행?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후 아이티 경찰은 모이즈 대통령을 살해한 용의자들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했다. 인질로 붙잡혔던 경찰관 3명도 구출했다. 경찰은 예상 도주로를 차단, 용의자들을 포위한 채 수시간째 대치를 벌이기도 했다. 앞서 괴한들은 이날 새벽 1시 대통령 사저에 침입해 모이즈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당해 중태에 빠진 마르틴 모이즈 영부인은 미국으로 긴급 후송됐다. 아이티 정부는 계엄령과 2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제공항을 폐쇄했다. 보시트 에드몽 주미 아이티 대사는 나머지 암살범들이 이웃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이나 해상으로 도주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나섰다.
범인들은 일단 ‘미국 소행’으로 비치도록 치밀하게 위장했다. 범행 현장을 촬영한 영상엔 소총으로 무장한 용의자들이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 행세를 하는 모습이 담겼다. 또 괴한 일부는 아이티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어 대신, 영어와 스페인어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옹 샤를 경찰청장은 이들을 “용병”이라고 지칭했고,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도 “고도로 훈련된 특공대가 투입된 것으로 본다”며 국제적 조사를 요청했다. 체포되거나 사살된 용의자들의 신원은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으나, 프라델 엔리케스 통신장관은 “외국인”이라고 밝혔다. 사저 인근 주민들도 “아이티에서 본 적 없는 무기를 봤다” “스페인어로 말하는 걸 들었다” “백인도 있었다”는 등의 증언을 쏟아냈다. 미국은 DEA와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다.
정치 혼란·인도주의 위기… 반대파 음모?
암살 배후는 오리무중이다.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나 조직도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만약 외부 세력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국제적 문제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 다만 최근 아이티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내부 반대세력의 범행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암살범들이 수사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DEA를 사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대통령 경호요원들이 왜 이들을 저지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바나나 수출업을 하다가 2015년 정계에 진출한 이른바 ‘바나나맨’ 모이즈 대통령은 2017년 2월 취임했는데, 임기 문제를 둘러싸고 야당과 줄곧 갈등을 빚었다. 야권은 올해 2월로 임기가 끝났다며 퇴진을 요구했으나, 그는 “부정선거 탓에 당선 1년 뒤에야 취임했다”며 내년까지 임기가 보장된다고 맞섰다.
급기야 지난 2월 7일엔 ‘나를 죽이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며 대법관 등 야권 인사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대통령 권한 강화를 위한 개헌도 추진했다. 올해 9월 총선과 대선, 개헌 국민투표 때까지 정국 불안정은 기정사실이었다.
게다가 치안 문제와 경제난도 심각하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선 방화와 폭력 범죄, 납치 사건이 끊이지 않아, 지난달에만 1만3,000명이 유엔 임시대피소로 도망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식량난이 악화하면서 인구 60%가 빈곤 상태에 빠졌고,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5세 이하 아동 수(8만6,000명)도 두 배 늘었다. 2010년 대지진과 2016년 허리케인이 할퀸 상처도 여전하다. 인도주의 위기는 반(反)정부 시위로 터져 나오며 정국 혼란을 더했다.
힘의 공백에 정국 혼란 가중… 국제사회 우려
이런 가운데 터진 대통령 암살로 아이티는 이제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다. 당장 누가 통치권을 승계하느냐는 문제부터 논란이다.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 시 대법원장이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고 규정돼 있지만, 최근 르네 실베스트르 대법원장은 코로나19로 사망했다. 모이즈 대통령은 불과 하루 전 신경외과 의사인 아리엘 앙리를 새 총리로 지명했으나, 조제프 임시 총리는 앙리 지명자가 취임 전이라 자신이 총리직을 수행하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앙리 지명자는 “내가 현직 총리”라며 반발하고 있다. 아이티 태생 사회학자인 알렉스 듀푸이 미국 웨슬리언대 교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하루 빨리 선거를 치르는 것인데 힘의 균형이 어떻게 변하느냐가 문제”라며 “현재 상황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하다”고 진단했다.
국제사회도 대응에 나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8일 비공개 회의를 열어 아이티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15개 이사국은 “가해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규탄 성명도 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문재인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 각국 정상들도 애도를 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이티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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