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 후 '바나나 사업'으로 성공 가도
2015년 대선 승리... 정치권 "바나나맨" 조롱
대통령 권한 강화 개헌에 "독재자 행보" 비판
"권력엘리트 해체하려던 개혁가" 긍정 평가도
대통령 사저를 침입한 무장 괴한들의 총격으로 7일(현지시간) 사망한 조브넬 모이즈(53) 아이티 대통령은 일각에선 ‘독재자’라는, 다른 한편에선 ‘개혁가’라는 식의 엇갈린 평가를 받아 왔다. 지난 2015년 대선 출마 전까지만 해도 중앙 정계에서 이름값이 높지 않았고, 취임 후엔 권력 엘리트뿐 아니라 야당과도 대립각을 세워 왔던 인물이다.
모이즈 대통령은 1968년 아이티 북동부 트루뒤노르의 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가족이 이주했고, 키시케야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이후 바나나 수출업 경영자가 된 뒤, 이후 자동차 부품업에도 진출해 ‘성공한 사업가’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고 미국 일간 뉴욕포스트는 전했다. 기성 정치권이 조롱의 의미가 담긴 ‘바나나맨’이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인 이유다.
모이즈 대통령은 지역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2015년 미셸 마텔리 당시 대통령이 그를 차기 대선 후보로 지명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다.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 모이즈 후보는 득표율(32.81%) 1위에 올랐으나, 과반을 얻진 못해 2차 투표가 진행됐다. 하지만 초강력 허리케인 매튜의 여파로 각종 피해가 속출함에 따라, 결선 투표는 계속 연기됐고 이듬해 실시된 재선거에서 55.67%의 득표율를 기록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7년 2월 공식 취임한 모이즈 대통령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탓에 나락으로 떨어진 국가 경제 재건 과제를 떠안았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기산점을 언제로 잡을지에 대한 논쟁, 아이티의 인프라 건설 사업을 둘러싼 논란 등이 이어지면서 야당은 물론, 기존의 권력 엘리트층과 충돌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야권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을 밀어붙였다. 심지어 이에 저항하는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정치깡패를 동원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사회 혼란이 지속되며 시민들이 퇴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오는 9월 모이즈 대통령이 추진해 온 개헌 국민투표와 대선, 총선이 한꺼번에 예정돼 있어 정치적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사실상 독재자의 행보를 걸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권력 엘리트 계층을 해체하려는 목적을 가진 개혁가’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모이즈 대통령 당선에 협력했지만 야당 쪽으로 돌아선 정치인 피에르 레지날드 불로는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모이즈 대통령은) 아이티의 변화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었다”며 “하루에 20시간을 일하는 대통령이었고, 새 아이티를 보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은 진심이었다”고 평했다.
이처럼 모이즈 대통령에 대한 정반대 시각을 방증하듯, 아이티 정계와 재계에선 그를 축출하려는 기류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포스트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모이즈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과 시위자들은 많았다”며 “지금까지 살해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에겐 적들이 적지 않았다”고 짚었다. 불로 역시 암살 배후 세력에 관한 질문엔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고 NYT에 말했다.
한편 모이즈 대통령은 대학 때부터 연을 맺은 부인 마르틴 모이즈와의 사이에 세 자녀 조말리, 조버린, 조브넬 주니어를 두고 있다. 마르틴은 이번 총격으로 중상을 입고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메모리얼병원 라이더트라우마센터로 후송됐다. 세 자녀의 상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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