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 첫발… 의장엔 원주민 여성 선출
지하철 요금 항의 시위 근 2년 만에 착수
남미 국가 칠레의 ‘민중 헌법 만들기’ 실험이 대장정의 첫발을 뗐다. 40여년 전 군부독재 시절 소수 지배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의 부조리가 2019년 전국 규모의 지하철 요금 인상 항의 시위로 성토되기 시작한 뒤 근 2년 만이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155명으로 구성된 칠레 제헌의회가 4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의 옛 국회의사당에서 출범식을 열고 새 헌법 초안 작성 작업에 공식 착수했다.
의장으로는 전체 의원 96명의 표를 얻은 최대 원주민 부족 마푸체족 출신 무소속 의원 엘리사 롱콘 산티아고대 교수가 뽑혔다. 롱콘 의장은 제헌 과정이 최대한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투명하게 진행되도록 유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제헌의회가 칠레를 바꿔놓을 것”이라면서다. 그녀가 이끄는 제헌의회는 앞으로 짧게는 9개월, 길게는 1년 동안 헌법 초안을 만들게 되고, 초안은 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거쳐 국민 투표에 부쳐진다.
제헌 논의는 칠레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모였던 2019년 10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 비롯됐다.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50원(30페소) 인상에 화난 시민들이 요금을 내지 않고 개찰구를 뛰어넘는 식으로 항의했는데, 한 달 지하철 요금이 최저임금 노동자 월소득의 12%에 이르는 고(高)물가를 조장하고 방치한 정부 규탄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요구는 근본적인 변화였다. 교육과 의료, 노동 등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불평등과 부조리의 뿌리가 피노체트 군부독재 때(1973~1990년)인 1980년 소수 엘리트 계층이 만든 현행 헌법이라는 게 이들이 도달한 인식이었다. 거센 시위가 계속되자 정치권은 제헌이 필요한지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데 합의했고 지난해 10월 실시된 투표에서 국민 78%가 제헌에 찬성했다.
제헌의회는 새롭고 다양하다. 5월 총선에서는 우파 기득권 정치인들 대신 무소속과 좌파가 전체 의석의 약 65%를 차지했다. 세계 최초 의원 성비 균형제 도입으로 남성 78명, 여성 77명이 의회에 들어왔고, 155석 중 17석은 원주민 자체 선출 몫으로 할당됐다. 이번 제헌의회 직업군이 변호사, 교사, 주부, 과학자, 사회복지사, 작가, 기자, 의사 등으로 다양하다고 AFP는 전했다.
그러나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심한 양극화가 칠레 정치의 전통적 특성인 데다 무소속이 다수여서 주도 세력이 없다 보니 각계각층 의견이 수렴되지 못하고 논의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 성과를 거둔다면 칠레가 반정부 시위를 통한 사회 변화에 실패한 전력이 있는 페루, 콜롬비아 등 다른 남미 국가들에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CNN방송은 내다봤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