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으로 시나리오 작가 데뷔한 글 쓰는 배우 염문경
“연기가 우선이냐 글 쓰는 것이 우선이냐 묻는다면 대답은 배우라고 할 겁니다. 먼저 시작한 것도 연기이고 배우를 했기에 작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양쪽에 동등한 책임감을 갖고 일하려고 합니다.”
2012년 연극 배우로 데뷔해 연기 경력만 10년 차인 염문경은 요즘 작가로 더 많이 불린다. EBS ‘자이언트 펭TV’의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펭수를 톱스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가가 알고 보니 배우 출신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올 초 EBS ‘딩동댕 대학교’에 작가로 참여하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그는 얼마 전엔 장편영화 시나리오 작가 데뷔까지 마쳤다. 스스로 이름 붙인 직업명인 ‘다목적 프리랜서’의 '다목적'에서 뜻하지 않게 작가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셈이다.
배우, 작가, 감독 등 다목적 재능 가운데 연기에 애정이 많은 그로선 아쉬울 법도 하다. 최근 서울 동작구의 한 극장에서 만난 염문경은 “지난해까지 고뇌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털어놨다. ‘펭TV’ 작가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먹기도 했단다. '안시성' '박열' '악질경찰' 등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주로 단역이어서 배우로서 보여준 것이 아직 많지 않다는 점이 큰 이유일 것이다.
고민이 깊어갈 무렵 그는 점집을 찾았다. ‘배우로 잘 풀릴 테니 기다려라, 그런데 작가로 더 빨리 풀릴 거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을 전엔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배우로서 저라는 재료가 좀 더 괜찮아질 것 같아서요.”
지난달 23일 개봉한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감독 김조광수)은 그가 마음을 다스리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작가뿐 아니라 배우로도 참여할 수 있어 그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영화는 옥탑방에 함께 지내게 된 두 친구가 각각 펼치는 동성 로맨스를 그린다.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는 퀴어 영화인데도 어두운 기색 하나 없는 점이 독특하다.
“남성 퀴어 영화인데 제가 당사자성이 없어 편견이 들어갈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감독님을 믿고 썼죠. 시나리오에 쓸 재료들을 많이 제공해주셨어요. 동성애라는 점만 빼면 평범하고 뻔한 연애담이에요. 연애에선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 하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랐죠.”
작가로서 염문경의 장점은 평범함 속에서 독특함을 찾아내는 예리함이다. 올 초 펴낸 에세이 제목처럼 '내향형 인간의 농담'이 곳곳에 숨어 있다.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지만 가끔씩 정곡을 짚는 섬세한 화법. 그는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 웃기기보다 전형적인 캐릭터일지라도 좀 더 세분화된 전형적인 특징을 묘사하는 걸 즐긴다”고 했다. 연기자로서 쌓은 경험 덕에 인물의 특징이나 대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디테일에 신경을 쓴다.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그리는 ‘메이드 인 루프탑’에서도 빛나는 건 생동감 넘치는 두 주인공 캐릭터와 이들의 맛깔나는 대사들이다.
직접 연출한 두 편의 단편영화 ‘현피’ ‘백야’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연기자로 참여했다. 두 주인공 중 한 명의 남자친구를 오빠로 둔 동생 역이다. 출연 분량이 많진 않지만 무심한 듯 따뜻한 시선을 지닌 이 인물은 성소수자를 성다수자와 연결시키고, 판타지를 현실과 연결시킨다.
염문경은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 활동을 시작으로 연기에 발을 들였다.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 2015년 MBC 단막극 겸 웹드라마 ‘퐁당퐁당 러브’ 보조 작가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메인 작가로서 첫 작품은 EBS 어린이 드라마 ‘마법소녀 최리’, 이 작품을 함께했던 이슬예나 PD와 함께 기획한 것이 ‘자이언트 펭TV’다.
젠더 이슈는 염문경이 관심을 갖는 주제 중 하나다. 온라인상에서 싸우다가 ‘현피’를 뜨기로 한 남녀가 만나 논쟁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현피'에 이어 성추행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극화한 '백야'에선 성폭력 가해자의 사망 후 남겨진 피해자의 심리를 그렸다. 차기작인 영화에서도 성범죄를 추적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릴 예정이다. 범죄자를 응징하는 쾌감보다는 여성들의 서사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란다.
"다목적이라고 하긴 했지만 연출은 아직 확신이 없어요. 영상을 연출하는 감각은 이야기를 쓰고 캐릭터를 만드는 능력과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편 연출 데뷔를 목표로 삼고 있진 않습니다. 작가와 연기는 계속하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하든 한 가지 작업을 할 땐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싶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