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페미니스트 여러분, 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
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이른바 '영(young) 페미니스트'들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98학번 강유 감독은 당시 페미니즘을 함께 외쳤던, 이제는 중년이 된 영 페미니스트 5명을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민다. 학내 반성폭력 운동부터 호주제와 군 가산점제 폐지 등에 앞장섰던 그들의 뜨거웠던 매일매일이 어떻게 오늘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30일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강유 감독은 "지금의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이 영화를 통해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유 감독의 실제 친구이기도 한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양의 삶을 살고 있다. 키라(허은주)는 전북 정읍에서 수의사로 일하면서 소싸움 반대 시위를 하고 있고, 짜투리(김이승현)는 제주로 이주해 농수산물 꾸러미 사업을 한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어라(유여원), 인디 뮤지션 흐른(강정임),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오매(김혜정)까지, 더 이상 '영'하지 않은 영 페미니스트의 모습으로다.
영 페미니스트는 거대 담론보다 일상의 문제에 관심 갖던 당시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을 일컫던 호칭이다. 별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고, 나이나 학번을 따지지 않고 반말을 하는 문화가 이들로부터 비롯됐다.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면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성추행 방지 방송이 흘러나오고,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이 성범죄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얻어낸 결과다.
"이 영화가 우리 땐 이런 일도 했다는 식의 추억팔이로는 비치지 않았으면 했어요. 지금도 너무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니까요." 영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은 낯설지 않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방위로 확장된 여성 혐오와 백래시에 맞서는 2021년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분투와도 포개진다. 세대가 달라도 여성들의 삶은 연결돼 있다는 게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강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다. 2000년대 초반 여성주의 커뮤니티 '언니네' 초기 멤버가 모인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동산 개발주의를 다룬 '모래(2011)'로 주목받으며 데뷔했다. "기가 약해서 어떻게 영화감독을 하겠냐"는 어머니의 우려와 달리 그는 누구보다 맹렬하고 치열하게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해왔다 기지촌 여성의 일상을 담은 '이태원(2016)', 나라를 바꾼 페미니스트 이야기 '시국페미(2017)' 등은 그의 대표작. "아직도 여성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는 분위기가 있어요. 여성 감독이 만들면 사적 다큐가 되고, 남자 감독이 비슷한 걸 만들면 노동 문제가 되는 것처럼요.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얘기하면 여성의 문제도 공적인 방식으로 기록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는 일상의 페미니즘을 비춘다. 여성단체 활동가나 여성학 연구자 등 여성운동 현업에 있는 이들은 일부러 배제했다. "열혈 투사 같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깨뜨리고 싶었거든요. 어떤 상이 아니라 우리 옆의 누군가, 일상에서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얼굴 있는 사람들로 인지했으면 좋겠어요." 다만 이런 원칙을 깬 단 한 명의 출연자가 있으니, 16년 전 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로 시작해 소장이 된 오매다. "활동가의 노력이나 공로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갖는다. "제 기억 한도 내의 시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어요. 다음에 이걸 본 사람이 또 자신의 기록을 만들 수 있도록요." 영 페미니스트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 시기의 젊은 페미니스트 간 '단절'이라는 착시가 발생하는 것도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탓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14년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뭘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우리는 매일매일'은 2019년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첫 공개돼 작품상(한국 경쟁)을 받고,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장편 경쟁), 독불장군상을 타면서 빛을 봤다. 4월 텀블벅으로 개봉 후원금 2,000만 원을 마련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진은영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어떤 말이든 뒤에 붙일 수 있다. "개인적으론 '질문한다'는 말을 붙이고 싶어요. 처한 상황, 조건, 시스템에 대해 질문을 하는 데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니까요." 강유 감독은 페미니스트의 '매일매일'을 담으면서 '우리'라는 말에서는 연대의 의미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를 놓고 보면 이들은 꼭 질문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싸우고, 좌절하고, 모순된 삶을 살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죠. 그냥 사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면서요!"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이 고단하고 외롭다고 느끼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위로다. 그의 말대로 '한 걸음의 진보와 두 걸음의 후퇴'를 할지언정 "우리는 매일매일 나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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