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마감일을 맞추려면 몇 달 동안 밤낮 없이 일해야 합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는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이러다 계약이 끊길까 걱정입니다.”
경기 판교에 위치한 직원 30여 명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SW) 스타트업 A사의 대표 박모(45)씨는 울분을 터트렸다. 몇 년간 고생 끝에 겨우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주52시간 근무제’로 갓 수주한 계약들이 좌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말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한 해외기업과의 협업은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상황이다. 정부에서 3개월간 주52시간 넘게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보장해주지만, 10월 이후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박 대표는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추가근무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법을 어길 수도 없어 혼자서라도 밤을 새 근무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23일 산업계에 따르면, 7월 1일부터 52시간제 적용을 앞둔 종업원 5인 이상 50인 미만 기업들은 저마다 A사와 같은 고민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앞서 2018년 7월 300인 이상 사업장에 52시간제가 우선 적용된 이후, 사실상 3년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셈이지만 최저임금 인상, 코로나19 충격 등으로 여전히 "불가항력인 상황"임을 호소하고 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직원 40여 명이 근무 중인 자동차 부품업체에선 최근 20년 넘게 근무한 숙련공 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다음 달부터 야근·특근이 불가능해지면서 월급이 30% 이상 줄게 돼, 다른 일을 하기 위해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다른 직원들 사이에도 퇴사 관련 면담 요청이 속출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 임모(68)씨는 “우리 같이 작은 회사는 숙련공 한 명이 4~5명 역할을 하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다”며 “직원을 붙잡고 싶지만, 무턱대고 기본급을 올려주기도 힘든 상황이라 정부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충남 서산에서 직원 5명과 함께 30년가량 우유보급소를 운영한 김모(65)씨는 인건비 부담 걱정이 크다. 그동안은 직원들과 상의해 바쁠 때는 몇 시간씩 일을 더하기도 했지만, 앞으로는 아예 사람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추가 채용 인력에 대한 인건비 지원이 충분치 않으면 영세 사업주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버티다 안되면 문 닫는 것도 생각 중”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문가들은 경영 환경이 영세한 5~49인 기업의 52시간제 고충을 해소하려면 직접적인 비용 지원보다는 오히려 제도적 지원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인건비 지원 같은 단기적 처방보다는 지속가능한 방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정우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기업이 경기 사이클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연장 근로의 한도를 주12시간이 아닌 월 단위나 연간 단위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별 특성에 따라 ‘맞춤형 유연근무제’를 도입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상명 한양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풀뿌리 산업이나 벤처·스타트업의 경우 일이 몰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유연근무제가 더 필요하다”며 “산업의 특성에 맞춰 기업이 유연근무제를 사용할 자율권이 주어져야 하는데, 일괄적으로 6개월간 평균 주52시간을 맞춰야 하는 현행 제도는 기업별 실정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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