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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재영이 물었다, 추리닝 입고 인터뷰해도 되나요? 

입력
2021.06.23 07:30
수정
2021.06.23 08:3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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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정재영의 출연작 속 여러 모습들. 팔색조라는 수식이 어울린다.

정재영의 출연작 속 여러 모습들. 팔색조라는 수식이 어울린다.

2006년 4월 그를 처음 만났다. 영화 ‘마이 캡틴 김대출’(2006)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면하기 전까지 영화로 쌓은 그에 대한 인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해석할 수 없는 그림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무서우면서도 부드럽고, 세련된 듯 촌스러웠으며 우악스러운 듯 섬세해 보였다.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는 명배우들이 그렇듯 정재영의 이미지는 뭐라 규정짓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재영은 여느 배우와 다르지 않았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사진 촬영에 임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는 스타에서 동네 친구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는 갑자기 “추리닝을 입고 인터뷰를 해도 되냐”고 양해를 구했다. “괜찮다”고 답하자 그는 화장실에서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고 자리로 돌아왔다. “촬영 없는 날은 주로 집에 있는데 추리닝을 입고 있으면 마음이 제일 편하거든요.”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입는 옷들은 멋은 입지만 답답하다”고도 했다. 아리송했던 정재영의 인상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소탈하면서도 서민적 풍모가 강한, 연기 고수였다. 정재영은 이후 인터뷰로 다시 만났을 때도 사진 촬영이 끝난 후 여지없이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정재영은 '이끼'에서 수수께끼 인물인 70대 이장 천용덕을 연기했다. 이 역할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CJ ENM 제공

정재영은 '이끼'에서 수수께끼 인물인 70대 이장 천용덕을 연기했다. 이 역할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CJ ENM 제공

정재영이 내 눈에 들어온 첫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2001)였다. 그는 킬러 재영을 연기했는데, 제목과 달리 영화 속 킬러들 중 가장 과묵한 인물이었다. 얼굴 선이 굵은 데다 훤칠한 키의 그는 사나워 보였다. 이어서 본 ‘피도 눈물도 없이’(2002)는 그런 그의 인상을 굳게 만들었다. 여자에게 유리잔을 내던지는 모습이 흉포했다. 맡은 배역의 이름마저 독불이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실제로도 독하고 사납고 광포한 인물일 듯했다.

‘아는 여자’(2004)를 보고 정재영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거친 남성성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뭔가 허술한 듯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는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야구선수 동치성을 연기했다. 죽으려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 사력을 다했다가 뜻밖에 5등을 차지하기도 하는, 짠하게 웃기는 인물이었다. ‘아는 여자’로 정재영의 부드러운 면모를 발견했다면, ‘나의 결혼 원정기’(2005)는 신세계 같았다. 그는 순박한 농촌 노총각 만택을 연기했는데 이전과는 다른 면모였다. 영화는 외국인 신부를 얻을 요량으로 만택이 친구들과 우즈베키스탄에 맞선을 보러 가는 여정을 통해 웃음과 비애 등 여러 감정을 전한다. 영화가 빚어낸 감정 대부분은 정재영의 연기에 의존한다.

정재영은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농촌 노총각 만택을 연기했다. 환희에 찬 얼굴 표정을 연기한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다양하게 패러디됐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재영은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농촌 노총각 만택을 연기했다. 환희에 찬 얼굴 표정을 연기한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다양하게 패러디됐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그의 재능은 고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연기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 전국 청소년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장진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정재영을 눈여겨보고 오랫동안 협업했다. 2000년대 충무로 실력자였던 강우석 감독 역시 정재영의 재능을 높이 샀다. 박중훈과 설경구에 이어 충무로 정상급 배우로 견인할 수 있는 재목으로 정재영을 점찍었다. ‘투캅스’ 시리즈와 ‘공공의 적’ 시리즈 등을 함께 작업하며 박중훈, 설경구와 한국 영화계를 호령했듯이, 정재영과 함께 새 전성기를 열길 기대했다.

정재영은 연기 폭이 넓은 만큼, 영화를 보는 시야도 넓다. 인기에 취하기보다 완성도 높은 영화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그는 “영화를 정확히 잘 짚는다”는 이유로 교유하게 된 한 영화평론가와 만남을 지속하며 연기 진로를 탐색한다. 평론에 귀 기울이고 평론가와 곧잘 대화 나누는 유명 배우는 정재영을 제외하고는 못 봤다. 영화를 깊이 파고들려는 그의 마음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등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으로 이어졌고, 로카르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이란 성과를 낳았다.

정재영은 '플랜맨'에서 한치라도 오차가 있거나 조금이라도 지저분하면 참지 못하는 인물 한정석을 연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재영은 '플랜맨'에서 한치라도 오차가 있거나 조금이라도 지저분하면 참지 못하는 인물 한정석을 연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재영은 연기력에 비해 상업적으로 저평가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욕조에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질겁하는 결벽증 인물(‘플랜맨’ㆍ2013)을 연기하고선, 발 냄새 풀풀 풍기는 ‘청결의식 제로’ 언론사 간부 역할(‘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ㆍ2015)을 맡기도 했다. 정반대 이미지의 인물을 연기해도 어색하다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오롯이 연기의 힘이다. 스타라며 고자세를 유지하기보다 소탈하게 사람들과 만나며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정재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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