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관 매설현장 화재감시 40대 여성 근로자
일용직 채용 한 달 보름 만에 극단적 선택
유서에 "손목 아파도 다른 일 시키고 무시"
경찰·노동부 "괴롭힘·부당 업무 지시 조사”
경북 포항의 배관공사 현장에서 '화재감시' 일을 하던 40대 여성 일용직 근로자가 '무거운 자재를 옮기는 등 부당한 업무 지시에 힘들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현장 관리자의 지속적인 폭언과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다고 주장하며 특별근로감독과 엄중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경찰과 고용노동부 포항지청은 건설회사를 상대로 부당한 업무 지시가 있었는지 등을 조사하고 있다.
16일 전국플랜트건설노조 포항지부 등에 따르면 10일 포항의 한 배관공사 현장에서 화재감시 일을 하던 일용직 근로자 A(48)씨가 조퇴한 뒤 집 식탁에 "부당한 업무 지시에 힘들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쓰러져 있었다. A씨는 퇴근 후 집에 온 가족이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다음 날 오전 6시 숨을 거뒀다.
A씨는 유서에 "살고 싶어서 화재감시라는 일을 하게 됐지만, 너무 치욕스럽고 무시당해 살고 싶지 않다"며 "내가 죽는 이유가 나를 무시한 인간들 때문"이라는 글을 남겼다.
A씨가 일을 시작한 날짜는 4월 26일이다. 건설회사 일용직 근로자로 채용된 그는 최저임금 수준인 일당 8만3,000원에, 배관 용접 과정 중 불티가 튀어 불이 나면 근로자를 대피시키는 화재감시 일을 했다.
하지만 A씨는 화재감시 외에도 자재를 옮기거나 포장지를 씌우고 벗기는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서에 "6m짜리 파이프 100개를 옮기고 포장지를 벗기거나 씌우는 일을 했다"며 "손목이 아파 못할 것 같다고 하면 관리자가 더 짜증을 내 묵묵히 했다"고 썼다. 산업안전보건규칙 제241조의2제1항에는 화재감시자와 관련해 사업장에서 화재 발생 우려가 있는 장소에서 용접·용단 작업을 하는 경우 화재감시자에게 화재의 위험을 감시하고 화재 시 근로자의 대피를 유도하는 업무 외에 다른 업무를 사업주가 부여할 경우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처벌토록 돼 있다.
특히 몸무게가 5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A씨는 화재감시원으로 채용됐는데도 부당한 업무 지시가 계속되자, 자신이 속한 플랜트노조 등에 고충을 털어놨다. 하지만 10일 일을 시킨 현장 관리자들이 A씨를 찾아와 '언제 다른 일을 시켰냐'고 따졌고, 관리자의 당당한 태도에 크게 놀란 그는 작업 현장에서 조퇴했다.
A씨는 유서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며 "저런 인간들(관리자들) 때문에 죽을 이유는 없지만 정말 비참하고 치욕스럽다"고 적었다.
노조 측은 "부당한 업무 지시 외에도 성희롱 등 고인에게 수치심과 모멸감까지 줬다"며 "인격적 모독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성 근로자의 죽음은 중대재해사고와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부는 즉각 해당 현장에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고, 경찰은 가해자들을 철저히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용노동부 포항지청과 포항남부경찰서는 A씨 회사 관계자를 상대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괴롭힘이 있었는지 등 사실 관계를 조사하고 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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