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100명 남짓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서 지휘자의 입장을 기다린다. 객석에 앉은 수많은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지휘자가 뚜벅뚜벅 입장한다. 관객은 박수로 지휘자를 맞는다. 이내 박수 소리는 잠잠해지고, 곡이 언제쯤 시작될지 모두 지휘봉만 바라본다. 오로지 지휘자만이 오늘 공연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휘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다릴 뿐이었다.
그 지휘자는 프랑스 출신의 마티외 에르조그. 지난달 21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코심)의 정기공연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연주된 작품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었는데, 이 곡은 특이하게 플루트가 혼자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된다. 지휘자는 바로 그 플루트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휘자와 단원 사이의 권력이 일시적으로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통상 솔로 악기가 단독으로 작품을 시작하는 경우 연주 타이밍을 단원 자율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객석의 모든 관객이 단 한 사람의 소리만을 기다리는 상황은 당사자에게 굉장한 압박감을 준다는 것을, 지휘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휘자는 기다린다. 부담이 될까 단원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연주자가 충분히 준비가 되면 스스로 시작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지휘자 에르조그는 "이 플루트의 시작은 플루트 단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 중 하나인데, 그녀라면 분명 이 환상적인 순간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내가 천천히 기다리면서 깊게 신뢰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당시 순간을 전했다.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코심의 이미선 플루트 수석은 공연 한 달 전부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는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해 반복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고 전했다. 이 수석은 "공연을 앞두고 베를린 필의 디지털콘서트홀 공연을 전부 시청했다"면서 "긴장하는 플루트 단원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하고, 연주 팁을 얻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수석은 공연 당일 지휘자의 배려 덕분에 준비된 시점에 연주를 할 수 있어서 안도감이 들었다고도 했다.
비슷한 작품으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있다. 이 곡의 경우 바순 연주자들이 압도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작품이다. '봄의 제전'은 바순의 긴 노래로 작품을 시작한다. 바순이 아주 높은 음으로 연주해야 하고,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음정을 정확하게 유지하려면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당연히 관객 모두가 바순만 지켜보는 터라 연주자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바순을 맡고 있는 이우택 단원은 "'봄의 제전'을 연주하는 날이면 특히 몸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 소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 연주 전에는 식사를 거른다"고 긴장감을 전했다. 이 곡을 앞둔 바순 단원에게는 공연 전까지 그 누구도 기분을 거스르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농담이 전해질 정도다.
지휘자 역시 이 긴장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휘자가 지휘봉을 휘두르며 시작하지 않고, 단원 스스로 음악을 열 수 있도록 배려한다. 마시모 자네티 경기필 상임지휘자는 "지휘자의 신호는 오히려 연주자를 방해할 뿐이며 단원들과는 리허설 때 충분히 어떤 연주를 할지 합의를 거쳤기 때문에 무대에서는 단지 그가 연주하기를 기다리면 충분하다"고 전했다.
오케스트라 공연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지휘자 손에 달려 있다. 무대 위에서 수십가지 악기가 통제되려면 그 권한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도로 위에서 교통정리가 되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치다. 하지만 때로는 기다림으로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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