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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얼굴에 스친 그 표정은 무슨 의미였을까

입력
2021.06.16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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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얼굴이 드러내는 감정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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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잘 속이는 이가 있다. 그러나 표정 읽기 전문가도 그 못지않게 많다. 지명수배자 사진을 흘낏 보고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얼굴에 불룩 튀어나온 볼과 주름을 보며 지금 저 사람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고, 1나노 초만 반짝하고 사라진 감정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극소수 달인도 있다.

우리는 매일 사람들을 판단한다. 누군가의 나이, 성별, 체형, 피부색, 머리카락 길이, 심박수, 제스처, 부지 중의 버릇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한다. 자주 쓰는 낱말, 목소리의 패턴과 높이, 리듬으로 나에게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를 헤아린다. 은은한 행동이나 논쟁의 순간을 추적하며 감정을 스캔하기도 한다. 군가 내 편인지 아닌지를 한눈에 알아보는 기술이야말로 서로 물어뜯는 이 세계의 절대적 생존법이라서.

그렇지만 그 표정이 흘리는 차이를 구별하기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치켜 올라간 윗눈꺼풀이 혐오감인지 분노인지, 저 미소가 지금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냥 사회 생활의 처세인지, 어떤 단서로 진짜 고통과 가짜 고통을 구분하는 건지는 거의 법의학 차원 같다. 저 자가 지금 면전에서 휴대폰을 집어 던질지 호주머니에 집어넣을지, 전처의 눈물이 아침 드라마 보고 배운 연기인지 정말 애들이 보고 싶어 저러는 건지 그 마음을 읽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시로 변하는 조명과 얼굴 각도의 개별성에 상관없이 바로 표정을 번역하는 장치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캐치하는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일이 빠를까? 그럼 세상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 저 애 얼굴은 만날 포커 페이스라는 말은 있지도 않을 텐데.

밤마다 뒤척이며 옛날 일을 들춘다. 그때 그 사람 얼굴에 스친 표정은 무슨 의미였을까? 완전한 절망의 사인이었을까, 영원히 인지 불가능한 타인의 얼굴이었을까?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날 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몰라 오늘까지도 의미없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을. 그 눈짓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챘다면 이렇게까지 감정을 마모시키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정말 그럴 수 있었다면 “너의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라던 김창완 노래도,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전람회 노래도, “처음 느낌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라는 유재하 노래도,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입가의 미소까지 그렸지만, 마지막까지도 알 수 없는 건 당신의 마음”이라던 방주연 노래도 나오지 않았겠지.

그 옛날 디오게네스는 랜턴을 들고 아테네 밤거리를 다니며 사람들 얼굴을 비추며 시민들의 정직함을 판단했다. 그런데 사실 한국인 절반은 미아리에서 당장 돗자리 펴도 될 만큼 최소한의 잠재적 인지 능력이 있다. 아이들도 누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으면 지금 즐거운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뻣뻣해진 입술 끝으로 미소를 과장하면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그게 미소를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그가 이편의 눈을 맞추자 마자 눈길을 피한다면 나를 홀리는 중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해 상황을 설명하는 그 친구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얼굴은 넘치도록 충분한 의사소통 도구니까.

다른 사람이 표정을 지적할 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자기 목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얼굴은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안다면 누구라도 엄청 창피해 할 것이다.

성별,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사람들 얼굴에는 최소한 여섯 개의 보편적 감정이 드러나 있다고 한다. 같은 영화며 티브이, 동일한 문화 규칙을 습득했다면 나라가 달라도 사람들은 특정한 표정의 의미에 동의할 것이다. 피지의 정글을 거쳐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종족들도 문제없이 표정을 해석할 것이다.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사람들은 그에 따르는 메시지를 자기도 모르게 얼굴 근육으로 보낸다. 민감한 사람들은 얼굴에 잠깐 머무르는 메시지를 곧바로 탐지한다. 감정은 그냥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즉, 표정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드러냈는지도 모르는 감정을 들여다본다는 이야기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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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볼을 들어 올린 뒤 꽉 조이는 근육이 말해줄 것이다. 슬픔은 안쪽 눈썹을 세로로 모으고 입술 끝을 내려뜨리는 근육에 담겨 있을 것이다. 화는 눈썹을 치켜 올린 다음 입술에 힘을 주는 근육이 드러낼 것이다. 공포는 눈썹과 윗 눈꺼풀을 동시에 구부린 다음 입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근육에 스며들 것이다. 역겨움은 코를 주름지게 하는 근육에 달려 있을 것이다. 실실 웃으면서 광대뼈와 입술 끝을 잇는 근육을 세게 당기고, 턱 근육을 푼 뒤 눈을 굴리면 잔머리의 대마왕이 갑자기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표정을 다른 표정 위에 얹는 감정의 레퍼토리, 조금 특별한 표현 시퀀스, 부호화된 표정 분류학을 섭렵하며 매일 추리 극장을 펼친다. 이때 눈썹은 혼란스러움과 집중력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그럼 한쪽 눈썹만 관찰할까? 아니면 눈썹 두 개를 한번에? 그것도 아니면 왼쪽 눈썹을 본 다음 오른쪽을 봐야 하나? 아예 얼굴 전체를 훑는 게 나을까? 그러나 우리에겐 얼굴 근육이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요모조모 정리한 표정 차트가 있다. 늘이거나 줄이고, 좁히거나 넓히고, 납작하게 또는 튀어나오게 하는 입술의 움직임을 느끼고, 눈과 볼 사이에서 부풀거나 처지는 피부에 반응하고, 눈 주위 주름과 인중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핀다면 이런 조합 정도는 가뿐히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모든 정보가 얼굴에 쓰여 있다 해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그것들을 취합하고 힌트의 무게를 재지? 사람들이 한 시간에 열 번 넘게 휴대폰을 확인하는 시대에 탐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 얼굴을 뜯어볼 여유가 어디 있어? 찡그린 눈썹을 감지하고 미소의 뉘앙스를 읽는 일만큼 피곤한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세상에 얼굴은 진짜 믿을만한 감정의 안내서일까? 얼굴에는 자체의 마음이 있어서 자발적인 근육 시스템으로 비자발적인 반응을 마구 억누를 텐데? 아무래도 얼굴이 보여주는 증거는 역시 부차적인 것만 같다. 진짜 감정이라고 믿는 것의 부가물. 그런데 그렇다고 얼굴이 부차적일 수 있을까?

너무 헷갈릴 때 우리는 숨겨둔 가장 강력한 무기, 직감을 꺼낸다. 디오게네스로부터 그렇게 멀리 왔는데도 우리는 타인에 대해 갖는 예감, 희미한 느낌을 골라 누군가를 판단한다. 그래도 조금 자신이 없다. 예감을 믿기 힘든 이유는 그게 어디서 비롯됐는지 몰라서이다. 우리는 그런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설명할 수 있다면? 표정을 분석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면?

표정은 자발적으로 만들 수 있다. 만약 누군가를 책망할 때 엄격해 보이고 싶다면 손쉽게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럼 상대는 자기를 노려보는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이다. 불쾌한 기분이 들 때는 한쪽 눈썹이 저절로 꿈틀댈 것이다. 억지로 웃을 때는 광대뼈와 입술 끝 근육을 풀 것이다. 누가 갑자기 웃긴다면 눈꺼풀 속 근육과 눈 주위 피부를 수축시킨 다음 입을 한껏 열어젖힐 것이다. 안 그러고 싶어도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 얼굴은 어떡해서든 억눌린 감정을 흘릴 것이다. 우는 아기의 앞머리 근육이 한 줄로 솟구치는 걸 보면 아무리 둔감한 사람도 지금 얘가 언짢다는 걸 알 것이다.

어떤 때 영혼도 없고 성가신 감정도 없는 기계가 되고 싶다. 그럼 그 사람이 만든 별 것도 없는 감정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단어 배열과 몸짓만으로 지금 상태를 오차없이 측량할 수 있겠지. 눈, 코, 입 같은 얼굴의 주요 구역을 분리한 다음 기하학 구조 속에 끼워 넣는 것으로 그 생각을 콕 알아 맞추겠지. 눈 주위의 주름 분포나 한쪽 눈썹의 음영 및 질감만으로 어떤 기분인지 바로 답이 나오겠지.

사실 얼굴에 스치는 감정을 집어내는 건 마법이 아니라 직관이다. 어쩌면 단순한 기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얼굴을 읽는 법은 어떻게 보면 음악을 읽는 훈련을 받은 뒤에 교향곡이 들리기 시작하는 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쳤던 경험이 특별한 추억이 되어 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영원히 바뀌는 것이다.

얼굴은 분명 굉장한 뉘앙스에 싸인 움직이는 풍경이며 알면 알수록 자체로 새로운 장소이다. 결국 모든 이해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정한 요점은 나만 내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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