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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이라더니...IT 기업에 만연한 직장 내 괴롭힘

입력
2021.06.14 16:00
수정
2021.06.14 17:14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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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왕구 논설위원이 노동ㆍ건강ㆍ복지ㆍ교육 등 주요한 사회 이슈의 이면을 심도 있게 취재해 그 쟁점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주요 이슈의 주인공과 관련 인물로부터 취재한 이슈에 얽힌 뒷이야기도 소개합니다.

지난 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열린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동조합의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노조 네이버 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성남=배우한 기자

지난 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열린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동조합의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노조 네이버 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성남=배우한 기자

“임원 A가 나를 거치지 않고 팀 멤버들을 매니징해 퇴사한 사실 때문에 고민이 많다. 인력부족으로 충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팀원들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어 스트레스가 많다.”, “A와 미팅할 때마다 내가 무능한 존재로 느껴지고 끝이 보이지 않아 괴롭다. 계속 이렇게 일할 수밖에 없을까.”

지난 7일 네이버 노조는 경기 성남 분당에 위치한 본사에서 이 회사 임원 A씨의 모욕적인 언행과 과중한 업무 부과에 고민하다 지난달 25일 극단적 선택을 한 이 회사 직원이 남긴 글을 소개하며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수운 네이버 노조 홍보국장은 “본사 로비에 마련된 고인의 추모 공간에는 네이버 직원들뿐만 아니라 밤 늦게 퇴근하는 분당ㆍ판교 일대 IT회사 직원들도 추모 리본을 놓고 간다”며 “고인이 겪은 일이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업계 전반의 구조적 문제라는 데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IT 기업이 수평적 문화? 전근대적 노무관리로 직원들은 수렁

지난해 한 취업전문사이트가 대학생 1,045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1위와 3위에 각각 카카오(14.2%)와 네이버(6.5%)가 꼽혔다. 높은 임금과 두터운 사내복지는 물론 성장 가능성과 비전, 워라밸을 중시하는 기업풍토 등은 청년들이 이들 IT기업을 선망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네이버 사태’가 상징하듯 ITㆍ게임업계에서도 위계를 이용한 부당한 지시, 폭언ㆍ폭행과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견제할 내부 시스템이 허술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직원 상호 간 호칭을 ‘님’으로 통일하거나 직급을 단순화하는 등 이들 기업이 내세웠던 '수평적인 기업문화'는 허울뿐이었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올해 초 한 중소 IT기업에 입사한 이혜영(가명)씨는 입사 이후 계속되고 있는 회사 대표의 직장 괴롭힘으로 퇴사를 준비하고 있다. 대표는 ‘일을 이딴 식으로 한다’고 화를 내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이씨가 작성한 문서를 출력해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퀄리티가 떨어진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허용되면서 미열이 나 출근하지 않고 이메일로 보고를 했더니 대표는 재택근무를 마뜩지 않아 하는 듯한 답메일을 보내왔다. 이씨는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에 보낸 이메일에서 “대면보고가 훨씬 더 좋다는 걸 알지만 코로나 시기인 만큼 출근하기 조심스러워 재택근무를 했는데 대표가 그런 식으로 반응해 서러웠다”며 “심지어 얼마 뒤 전체회의 자리에서 ‘누구라고 거명은 않겠지만 재택은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지 개인 업무를 보라는 게 아니다’라고 비아냥거려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재 이씨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은 이런 중소기업들뿐 아니라 네이버(종업원 1만131명, 이하 2018년 기준), 카카오(6,993명), 넥슨(5,214명) 등 거대 ITㆍ게임기업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과도한 장시간 노동, 비민주적 조직문화, 불투명한 성과평가나 보상기준' 등이 이들 기업의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이곳 구성원들은 언제라도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있는 셈이다.

네이버 노조에 따르면, 숨진 네이버 직원을 괴롭힌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임원 A씨의 경우 고인이 개발자임에도 불구하고 기획안을 짜올 것을 요구하거나 고인의 의견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면박하는 등 부당한 지시나 모욕적 언행을 일삼았다. 그는 이전 직장에서도 직원들을 "야"라고 부르는 등 독단적이고 군림적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많은 직원들이 퇴사하는 등의 전력이 업계에 알려져 있음에도, 네이버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이유로 A씨를 채용했다. IT업계의 기업문화가 결코 수평적이지도 않으며, 직원의 노동권 보호를 우선순위로 놓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입사 10년차라고 밝힌 한 네이버 직원은 “서로 ‘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떤 ‘님’이 시키는 건 거부할 수가 없다”며 “10년 전만 해도 개발자들이 팀장이나 리더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반박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인사상 불이익을 의식해 몸을 사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2016년 최고위급 임원이 사옥 1층 로비에서 직원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던 카카오의 경우 최근에는 장시간 근로와 인사평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에서 카카오는 주 52시간 위반, 임산부 시간외 근무 등이 적발됐고 연초 동료인사 평가 항목에 ‘함께 일하기 싫은 직원’을 꼽으라는 문항을 포함시켜 직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카카오 노조 관계자는 “카카오를 비롯한 IT기업들은 영업 외적인 영역인 인사ㆍ노무 등에 별로 관심이 없다”며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발생해도 회사 측은 여전히 수동적ㆍ소극적으로 판단하려는 분위기”라고 꼬집었다.

IT기업들의 낮은 노동감수성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2018년 민주노총 산하 IT산업노조의 ‘IT산업 온라인 실태조사’(503명 대상)에서 이직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이직사유로 ‘조직문화 및 인간관계에 대한 불만’(115명ㆍ복수응답)을 ‘인사ㆍ연봉에 대한 불만족’(174명)에 이어 두 번째로 꼽았다. IT기업들의 조직문화가 일반 기업들의 수직적 문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환민 IT산업노조 위원장은 ITㆍ게임 산업에는 이들만의 산업적 특징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한다. 김 위원장은 “주요 IT기업들의 경영진 상당수가 기존 대기업에서 왔다”며 “오너들이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는 것은 기존 기업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IT기업들에서 여전히 창업자들이 견제 없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기업규모에 걸맞은 인사관리 시스템 마련에 소극적인 점도 화를 키웠다. 김종진 선임연구위원은 “현대자동차나 SK 같은 회사를 보면 인사ㆍ노사관계를 담당하는 조직이 부회장급인 반면 IT기업들은 소그룹 그룹장에게 인사관리ㆍ노사관리를 맡긴다”며 “이들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고 있는 전근대적 조직문화에 관한 성찰이 없으면 제2, 제3의 네이버 사태가 터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2년…취약노동자는 보호 사각지대

한림대 재단 소속 병원 간호사들이 재단의 '일송가족의 날' 행사 장기자랑에 동원돼 공연을 하고 있다. 행사 강요는 업무의 적정 범위를 넘어 직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된다. 한림대 재단은 이후 이 행사를 폐지했다. 직장갑질119 제공

한림대 재단 소속 병원 간호사들이 재단의 '일송가족의 날' 행사 장기자랑에 동원돼 공연을 하고 있다. 행사 강요는 업무의 적정 범위를 넘어 직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된다. 한림대 재단은 이후 이 행사를 폐지했다. 직장갑질119 제공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2014년), 양진호 한국미래기술회장의 계열사 직원 폭행 사건(2018년) 등이 공분을 불러오면서 입법돼, 2019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 등)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전문가들은 ‘직장인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은 권리’라는 점을 법에 명시, 기존의 위계적 직장문화에 경각심을 줬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1,000명 대상)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직장갑질을 경험했다’는 응답자는 45.4%였으나 지난해 10월 36.0%, 올해 3월 조사에서는 32.5%로 감소하는 등 미약하지만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강분 노무법인 행복한 일 연구소 대표(공인노무사)는 “직장 내에서 타인에게 유무형의 고통을 주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전환기적인 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4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하청 노동자 등은 근로기준법을 근간으로 한 이 법 때문에 보호 사각지대에 놓인다. 올해 3월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줄어들었느냐는 질문에 공공기관 노동자들은 35.9%가 줄어들지 않았다고 답했지만, 4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들은 46.9%가 감소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노조 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취약노동자들이 체감하는 직장 내 괴롭힘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사례 중 사장을 포함해 3명이 근무하는 상점에서 일하고 있는 민혜은(가명)씨는 사장이 상품이 조금만 흐트러져 있어도 “생각을 하면서 상품 정리 좀 해”라고 지적하고 “옷 좀 깔끔히 입고 다녀라”고 부당하게 외모를 평가한다고 호소했지만 민씨는 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4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안전망연구센터 소장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의 분리, 금지되는 직장 내 괴롭힘의 유형을 담은 취업규칙 작성 등 강제조항은 중소사업장에서 적용이 어렵다”며 “법을 보완할 가이드라인을 촘촘히 만들고 중소사업장 사건에 대한 당국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4인 이하 사업장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 적용이 추가적 지출을 수반해 (4인 이하 사업장의) 열악한 현실을 악화시킬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부분적으로나마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권고하기도 했다.

가해자에 대한 직접 처벌 규정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행법에서 유일한 형사처벌조항은 회사(사용자)에 대한 것으로 회사가 직장 내 괴롭힘 발생을 신고한 근로자나 피해근로자에게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다만 10월부터 시행되는 개정법에는 가해자가 사용자나 친인척일 경우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행정적 제재가 강화된다.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가 사용자이거나 친인척인 경우는 25% 정도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는 “규율의 한계가 제한적이고 집행 체계도 미약한 근로기준법이 근간이 되면서 괴롭힘에 대한 실질적 제재를 부과하기 어려워진 점이 있다” 며 “노동법보다는 차별을 금지하는 보편적 인권법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규율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직장 내 괴롭힘 경험 및 예방교육 경험

직장 내 괴롭힘 경험 및 예방교육 경험


이왕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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