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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양심 가진 고급 기술자, 어떤 명예와도 바꿀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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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양심 가진 고급 기술자, 어떤 명예와도 바꿀 수 없어

입력
2021.06.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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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중산참비뇨의학과 원장?
6.25때 부상으로 한쪽 귀가 안 들렸던 아버지?
보훈병원서 27년 근무하며 환자들 아버지 모시듯
?의사 부부인 딸과 사위에게 "늘 베푸는 삶 살기를"


김욱 중산참비뇨의학과 원장. 보훈병원에서 27년을 채우고 정년퇴임한 후 올해초 개인의원을 개원했다.

김욱 중산참비뇨의학과 원장. 보훈병원에서 27년을 채우고 정년퇴임한 후 올해초 개인의원을 개원했다.

내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당연지사'가 아닐까. 모든 일이 당연한 듯이 흘러왔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 이상이었다. 처음 입어본 옷이 마치 10년 넘게 입어온 옷만큼 몸에 딱 맞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의사를 꿈꾼 것부터 그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을 채워야 하는 난을 만나면 주저 없이 ‘의사’라고 썼다. 부모님의 이름이나 주소를 적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울고 넘는 박달재' 자주 부르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난 의료인이었다. 약사였다. 어린 시절에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마법사였다. 70년대 동네 약국은 작은 병원 역할을 했다. 감기든 배앓이든 어머니의 약국에만 오면 씻은 듯이 나았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의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의료인을 지망한 것은 해리포터를 본 어린아이가 마법사를 꿈꾸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

의대에 진학하려면 공부라는 큰 난관이 있지만, 다행히 주변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 부분에서는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신 어머니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무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교육자 집안이라는 점이었다. 8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는 천생 교육자셨다. 아버지는 일에 있어서는 근면·성실하셨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늘 온화하셨다. 이웃이 시비를 걸어도 그냥 넘어갔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말년에 치매에 걸리셨을 때도 "여기 앉아 계세요"하고 소파에 앉혀놓으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의 성품 그대로 단정하게 사셨다. 나는 아버지의 반의반도 못 따라갔지만 어릴 때부터 주어진 일에 나름 충실하게 파고들었다.

재밌는 부분은 스트레스 해소법 역시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아버지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노래였다. 한국 사람치고 노래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지만, 내 아버지에게 음악은 가장 특별하고 요긴한 휴식처였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소파에 앉아 나직한 목소리로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1979년에 의예과 동기들과 그룹사운드를 만들었다. 베이스기타가 내 담당이었다. 당시는 학교 축제가 열리면 밴드를 초청했다. 다른 학과나 학교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연주를 했다. 고고 세 곡, 브루스 한 곡이 기본이었고 개런티도 꽤 두둑하게 받았다. 청중의 환호와 박수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본과 1학년 때까지 밴드 활동을 지속했다.

27년 동안 삼 천 케이스 이상 수술

돌이켜보면 보훈병원에서 27년 동안 봉직의로 일한 것도 여러 우연이 필연처럼 겹친 결과였다. 마치 누군가 운명의 시계를 맞춰놓기라도 한 듯 내가 군에서 제대하던 해에 보훈병원이 설립됐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병원에 첫 출근을 했다. 보훈병원에서도 한번도 내 길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의사가 체질"이란 것이었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수술이 좋았다. 27년 동안 3,000에서 4,000 케이스를 했다. 수술이 주는 스트레스도 있고, 수술 후에 회복과정도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았지만, 수술로 환자의 상태가 좋아질 걸 생각하면 "수술합시다"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수술 후에 돌아가신 분이 있었다. (암이었다.) 그때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다시는 수술을 안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나 두어 달쯤 후에는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약만 처방해줄 것 같으면 내가 여기에 의사 가운을 입고 앉아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괴감이 몰려왔던 것이었다. 보훈병원을 퇴직하면서 가장 아쉽고 섭섭했던 것도 수술이었다.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할 길이 없어졌다. 그동안 갈고닦은 의술의 정수를 그냥 묵혀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경요도적전립선절제술이 그렇다. 이 절제술은 내시경에 전기칼을 넣어 전립선을 절제하는 수술법으로 수술이 필요한 전립선 비대에 쓰이는 가장 전통적인 시술법이고 효과도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아직 손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더 이상 집도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다.

보훈병원이 내게 꽃자리였던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이후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쪽 귀가 안 들려."

아버지는 6.25 때 부상을 당했고, 아예 한쪽 청력을 잃었던 것이었다. 당신은 한번도 그걸 내색하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때까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청력과 관련해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다. 전쟁통에 의료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을 보훈병원에서 맞이하셨다. 이를테면, 보훈병원에서 만난 참전용사들 모두 내 아버지의 동료들이었다.

"의사는 양심을 가진 고급기술자" 베풀며 살아야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환자들은 내 아버지와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점이 많았다. 개원 초기 환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보훈병원 의사를 졸병처럼 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사와 병장'쯤 되는 관계로 인식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기합을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 아버지의 동료들을 돌보았던 일과 관련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바로 참전용사의 아내들이었다. 나에게는 그 아내들이 간호사 이상의 '동료'로 느껴졌다.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남편에게 뭐 잘못한 거 있으세요?"

그분들의 희생과 배려가 아니었다면 참전용사들이 지난한 후유증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어도 우리 역사의 가장 격렬한 부분을 온몸으로 겪은 참전용사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짱짱하던 분들도 나이가 들면서 결국 평범한 환자가 되어갔다. 나이가 드신 이후에는 오히려 선임처럼 으르렁거리던 때가 그리워졌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아직 한창이다. 그분들도 세월이 흐르고 힘이 빠지면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질 것이다.

참전용사들은 아버지와는 또 다른 교감이 있었다. 남자로서의 우정 같은 것이었다. 비뇨기과의 특징이기도 하다. 비뇨기와 관련된 고민은 어디서도 마음 터놓고 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치료의 과정은 곧 조금씩 벽을 허물고 의사와 환자에서 남자로서의 삶을 함께 영위해가는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정년퇴임을 한다고 했을 때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듯 눈시울을 붉힌 환자가 적지 않았다. "병원을 옮기겠다"는 분도 적지 않았다. 그 반응들이 의사로서의 중간 성적표이자 당신들에게 받은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생을 살았든 아쉽고 허전한 부분이 있고, 뿌린 것보다 더 거둔 덕에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의사로서의 내 삶은 100점 만점에 120점을 주고 싶다. 누군가는 "너무 뻔한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주어진 틀 안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보람찼다. 상대적으로 큰돈을 벌지도 못했고, 유명세도 얻지 못했으나 무명의 참전용사들처럼 내 삶이 공동체와 역사의 한 자락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은 세상의 그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

딸과 사위도 의업의 길을 걷고 있다. 딸은 안과 레지던트 3년차, 사위는 정형외과 의사다. 딸은 나와 성격이 닮았다. 부딪치는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심플한 삶을 추구한다. 딸에게 늘 해주는 말은 "의사는 양심을 가진 고급 기술자"라는 것이다.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재주도 타고났고, 성과도 얻었으니 응당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한다. 자기 삶에 주어진 숙제를 충실하게 이행한다면 딸도 자기 생의 훈장을 받을 것이다.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마음속의 자부심과 자신감이다.

2021년 봄, 새출발을 했다. 보훈병원을 정년퇴임한 이후 개인의원을 개원했다. 지금까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규 수업을 끝내고 자율학습에 들어간 기분이다. 정규 수업만큼 팍팍하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1인칭 시점에서 작성한 기사입니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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