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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20대 여성의 자살 '원인'이 아니다

입력
2021.06.12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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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실패한 한국 자살예방 정책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030 여성의 우울증을 오랫동안 취재하고 있다. 주변에서 몇 번의 자살을 경험한 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혹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취약해질 때가 있고 그럴 때 내게 오는 연락을 잘 받고 돌보려고 하지만 때로는 힘에 부친다. '지금 달려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라는 두려움 때문에 한동안 몸이 자주 아팠다. 이제는 매우 중대한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잠을 자고 마감을 하며 일상을 산다. 반대의 깨달음도 있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순간도 사실 매우 중대한 순간일 수 있다.

한국에서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한다. 한국은 2003년부터 2020년까지 2017년 단 한 해를 제외하고는 줄곧 OECD 국가 자살률 1위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노인자살률은 압도적이다. 보건복지부의 '2019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인구 10만 명당)은 2015년 58.6명으로 OECD 평균 18.8명보다 훨씬 높고 2위인 슬로베니아 38.7명과도 격차가 크다.

서울 한강대교 보도 난간에 '크게 웃으며 견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서울 한강대교 보도 난간에 '크게 웃으며 견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젊은 여성 자살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0대는 전체 사망의 절반 이상이 자살이다. 특히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코로나19 이후로 급증했다. 작년 20대 여성 자살시도자(보건복지부 집계)는 전년보다 33.5% 늘었다.

이 얘기를 하면 꼭 "남성 자살률은 더 높은데요?" 말이 나온다. 물론 남성 자살률이 더 높다. 남성 자살률은 국적 불문, 연령 불문 여성 자살률보다 높다. 더 치명적인 방법을 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빌리는 조력 자살 제도가 있다. 스위스 연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정확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조력 자살의 경우 여성의 자살률은 남성보다 높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자. 잘 알려졌듯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산다. 그런데 유독 특정 지역에서만 여성이 남성보다 일찍 죽는다면? 당연히 이 지역의 여성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통상적인 차이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청년 여성의 자살을 들여다보자는 건 이 의미다.

왜 자살하는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발표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27.7%가 '경제적 어려움'을 원인으로 꼽는다. 코로나19 이후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증가한 것도 고용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같은 이유가 크다고 본다. 인터뷰를 다니며 여성들이 가장 취약해지는 때는 돈이 없거나, 집이 없을 때라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한다. 지금 당장 자살위기에 빠진 이들의 통장에 300만 원만 입금돼도 자살률은 크게 낮아질 것이다.

번지수 잘못 찾은 자살예방정책

2004년 발표된 제1차 '자살예방대책 5개년계획' 보고서에 등장하는 자살영향요인모델 표. 보건복지부 제공

2004년 발표된 제1차 '자살예방대책 5개년계획' 보고서에 등장하는 자살영향요인모델 표. 보건복지부 제공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한국은 오랫동안 자살예방정책을 실시해왔으나 줄곧 실패했다. 나는 2004년 발표된 제1차 '자살예방대책 5개년계획' 보고서를 읽으면서부터 실패의 기운을 감지한다. 보고서는 "생물심리학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 중 80%는 우울증을 거쳐서 자살에 이르게 되며, 나머지 20%는 충동적인 상태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을 지적하면서(저 80/20 통계적 구분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대 의학이나 경제적 여건상 변화시키기 힘든 생물심리학적 요인이나 사회경제적 요인보다 자살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조기발견을 통한 치료가 가능한 우울증을 주요 사업대상으로 하는 것이 자살예방에 효율적임"을 강조한다.

우울증은 자살의 원인인가? 물론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단편적인 관점이다. 우울증과 자살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우울증이 삶에서 활력을 앗아간다면 자살은 삶을 끝내기 위해 강한 결단력과 힘을 필요로 한다. 한국은 높은 자살률에 비해 우울증 유병률이 타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낮으며, 실제 자살률은 남성에게서 더 높지만 우울증 유병률은 여성에게서 더 흔하다.

우울증은 자살의 원인이 아니다

자살이 늘 우울증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역사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사무라이의 할복자살은 무사의 명예를 지키는 방식으로서의 자살이다. 사진은 우익 민족주의자인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1970년 그는 기자들 앞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연설을 한 뒤 할복자살했다. 위키피디아

자살이 늘 우울증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역사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사무라이의 할복자살은 무사의 명예를 지키는 방식으로서의 자살이다. 사진은 우익 민족주의자인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1970년 그는 기자들 앞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연설을 한 뒤 할복자살했다. 위키피디아

자살예방을 위한 정신질환 역학조사에서 우울증은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사용된다. 이때 우울증은 자살의 분명한 원인이라기보다 자살과 자주 공존하는 문제로서 사용된다. 곧 우울증은 자살이라는 최종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매개변인으로서 쓰인다.

일례로 자살 관련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펴낸 정신질환실태역학조사에 따르면 자살계획을 한 여성의 절반가량이 기분장애를 경험하지만, 반면 자살계획을 한 남성의 절반가량은 알코올 사용 장애를 경험한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은 우울증과 달리 자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 혹은 자살 위험을 높이는 문제로 취급된다.

우울증은 알코올 중독, 물질 남용, 수면 장애와 마찬가지로 자살과 관련이 있지만 독립적인 문제일 수 있다. 우울증 치료가 자살 방지에 도움이 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또 우울증이 좋아졌다고 해서 자살 관련 행동을 보이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우울증에서 벗어난 직후에 활력을 되찾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우울증 끝의 자살"이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자살의 원인이 우울증이라면, 우울증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치료를 위해 정신과에 가도 우울증의 원인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주로 약을 통한 증상의 완화가 치료 목표다.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으로 볼수록, 여러 맥락 속 고통을 단순 개인의 치료 문제로 환원하여 자살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설명과 의미를 끌어내는 것을 막는다.

아픈 사람에게 배우라

자살 도구를 파는 가게만 장사가 잘되는 우울한 도시에서 가게 주인이 임신과 함께 희망을 품으며 삶의 즐거움을 되찾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파리의 자살가게'. 다음영화

자살 도구를 파는 가게만 장사가 잘되는 우울한 도시에서 가게 주인이 임신과 함께 희망을 품으며 삶의 즐거움을 되찾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파리의 자살가게'. 다음영화

인터뷰를 진행하며 고민해온 것을 토대로, 허락한다면 자살을 막기 위해 다음의 것들을 제안해보고 싶다. 첫째, 자살시도자를 혼자 두지 말 것. 많은 인터뷰이가 증언하길 자살시도 후 응급실에 실려 간 뒤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집에 가게 둔다"고 한다. 자살에 실패한 사람은 다음번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자살시도자 10명 중 3명이 과거에도 자살을 시도했다. 응급실 안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그들을 돌봐야 한다.

둘째, 자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하루에 38명이 자살로 죽어도 이에 관한 논의는 이상하리만치 없다. 자살로 누군가 죽으면 숨기고 쉬쉬하기 바쁘다. '베르테르 효과'를 염려한 자살 보도 원칙이 자살에 관한 철학적·사회적 사유를 막는 것은 아닌가? 자살로 인한 상실은 애도되기 전에 너무 빨리 잊힌다.

논의할 것이 너무도 많다. 가령 이런 것. 우리는 자살시도자를 어디까지 막을 수 있는가? 미국에 거주하는 인터뷰이 중 한 명은 상담 도중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병원에 이송되어 사흘간 갇혀있었다. 소리치며 화내는 인터뷰이에게 의사는 말했다. "당신이 내 동생이었어도 여기서 못 나가게 할 거예요. 당신은 너무 위험한 상황이고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사흘간 꼼짝 없이 갇혀있던 인터뷰이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자살은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나'잖아요. 폭력이 발생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켜야 하는데 자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인 거예요. 그래서 가해자는 가두고 피해자인 '나'는 안에서 사흘간 교육시키는 거죠. 100% 옳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 이해했어요"

셋째, 고통을 이해하는 문화를 완전히 바꾸자. 이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과도 같다. 돌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바로 바쁜 삶이다. 일에 치인 사람은 자기 돌봄을 비롯, 모든 돌봄에 소홀해진다. 한국은 효율과 쓸모를 중심으로 발전하며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이들을 재물로 바쳐왔다.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며 그들도 언젠가 늙고 병든다.

이제는 아픈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늙고, 암에 걸리고, 만성 질환을 앓고, 우울증을 겪고, 손목을 그어 본 모든 연약한 이들로부터 배우자. 고통을 잊으라 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사랑하는 책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의 문장으로 끝맺는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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