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시민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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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시민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입력
2021.06.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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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정
민원정칠레 가톨릭대 교수

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10여년 전에는 한국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따라야 한다더니 요즘엔 베네수엘라 꼴 날까봐 걱정들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좌)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8월 23일 피노체트에 대한 군 총사령관 임명식에 나란히 서있다. 그로부터 18일후,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고 아옌데는 이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AP=연합뉴스


로레나(가명)의 아버지는 아옌데 정부 시절 칠레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였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사회주의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베네수엘라 대사관으로 피신, 두 달 후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녀는 1975년 부모님이 계신 멕시코로 건너가 의대를 졸업했다.

돌아온 칠레는 기대와는 달랐다. 군사 독재 기간(1973~1990) 칠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 탄압과 인권 침해, 검열은 당연했다. 반면 중남미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라는 명성도 얻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기간 산업은 물론 심지어 전기와 수도 등 공공요금과 연금, 의료보험까지 외국 기업의 소유가 되었다. 군사 정권 말기인 1990년 기준 지니계수가 0.57에 이를 정도로 불평등도 심화했다.

1988년 선거에서 반대파가 56%의 득표로 승리하고, 1990년 민주 정부가 시작되었다. 단죄는 없었다. 피노체트는 사임 후 1998년 3월까지 칠레 육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은퇴 후 종신 상원 의원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 영국에서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던 피노체트는 칠레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재판을 피해 칠레로 돌아갔다. 2004년 가택 연금, 2006년 12월 10일 사망했다. 2004년 미국 은행에서 피노체트의 비밀 계좌가 발견된 후 14년 만인 2018년 칠레 대법원은 피노체트 가족으로부터 미화 약 160만 달러를 압수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 이행 여부는 미지수다.


칠레 산티아고 '기억과 인권 박물관'. 연합뉴스


잊었을 리 없다. 산티아고 시내에는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 박물관'이 있다. 쿠데타 당시 폭격당한 대통령 궁에서 발견된 아옌데의 부러진 안경은 국립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바첼렛 정부는 2010년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개관, 독재 정부의 탄압 기록을 공개했다. 고문 장소였던 '비야 그리말디'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생존자들이 안내를 맡고 있다. 비정부 기관인 CODEPU(인민권리 증진 및 수호 법인)는 독재 기간 중 사라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의 가족을 돕는다. 사회주의자의 망명을 돕던 일부 가톨릭 사제들은 지금은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다. 쿠데타를 기념하던 '11 de septiembre(9·11)' 거리는 2013년,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당장은 먹고사는 일이 급하다. 빈부격차는 여전하고(2020년 기준 지니계수 약 0.47), 공공병원 의사인 로레나도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지 않을 정도로 공공의료는 열악하다. 2019년 10월 시작된 시위의 주요 슬로건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는 칠레에서 태어났고 칠레에서 죽을 것이다"였다. 칠레의 정치는 이념이 아닌 자유시장주의 우파와 사회민주주의 좌파 사이에서 양극화되어 왔다. 중도 좌파 정부는 중산층과 빈곤층에 혜택을 주는 다양한 사회 프로그램을 도입했지만, 신자유주의 모델의 핵심 요소는 유지해 왔다. 군사 정권을 도운 미국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시위대의 요구대로 피노체트 시절 제정된 헌법의 새로 쓰기가 결정되고 5월 국민투표를 통해 103명의 무소속, 진보적 신인 정치인을 포함한 남녀 동수 155명의 ‘제헌’ 위원이 선출되었다. 내년에는 시장과 국가 간의 게임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정의하는 공공복지 지향적 기본법 초안이 비준될 예정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말처럼 시민의 자발적 행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아슬아슬한 개혁과 미완의 민주화가 줄타기 중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서울대 규장각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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