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계기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추진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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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계기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추진돼야”

입력
2021.06.03 16:50
수정
2021.06.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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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철의 관찰-정준모 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국가에 기증된 1만1,000건은 전체 ‘이건희 컬렉션’의 85%
실질은 선대 소장품 다수 포함된 ‘이병철ㆍ이건희 컬렉션’
청동기 유물부터 조선 백자, 근대 진경산수부터 샤갈까지 방대
이건희 컬렉션의 가장 큰 가치는 한국문화 관통하는 독자성
지자체 ‘이건희 미술관’ 설립ㆍ유치 경쟁 바람직하지 않아
기증작 종별로 합당한 전시기관에 ‘이건희 전시실’ 설치가 옳아
근현대작 대거 기증돼 차제에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추진돼야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집ㆍ보유했던 ‘이건희 컬렉션’의 국가 기증은 국내 기증 문화뿐만 아니라, 예술사에 있어서도 세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10조 원을 오간다는 소장품 시가총액이나 고대와 현재, 국내와 해외를 아우르는 수집품 목록의 방대함 때문만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건희 컬렉션의 진정한 가치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기존 국가 전시기관의 소장품 목록에서 그동안 문화사적으로나 미술사조로나 공백으로 남아 있던 수많은 빈 자리를 채울 퍼즐을 갖춘 데 있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이건희 컬렉션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기증품의 가치를 극대화할 방안 대신, 각 지자체 간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 쪽으로 기울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부터 이건희 컬렉션 기증의 의의부터 이건희 미술관 유치 논란에 이른 현안에 대해 들어본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의 사회문화적 가치는 막대하며, 이제 그 가치를 극대화할 과제가 우리 사회에 남겨졌다"고 말한다. 한진탁 인턴기자

-삼성을 창업하고 오늘을 일군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부자는 대를 이어 독보적인 미술품 컬렉션을 구축해왔다. 경기 용인의 호암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된 작품들이 그것이다. 그중 이번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범위는.

“사실 ‘이건희 컬렉션’이라고들 하지만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모아온 컬렉션도 많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이병철-이건희 컬렉션’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번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은 삼성문화재단 소유로 돼 있는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 호암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작품들 중 선대부터 수집돼 이건희 회장 개인 소유로 돼 있는 대부분 작품을 포함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번에 국가에 기증된 1만1,000건, 2만3,000점이 건수나 평가액 기준에서 전체 이건희 컬렉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통상 호암미술관과 리움에 소장된 작품은 2만 건 정도로 추정돼왔다. 그중 삼성문화재단 소유의 작품이 약 7,000건이라고 치면 이건희 컬렉션은 1만3,000건 정도 되는 셈인데, 그중 1만1,000건이 기증됐으니 2,000건 정도 빼곤 다 기증된 셈이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85%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증에서 제외된 2,000건 정도는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도 운영돼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소장되는 걸로 알고 있다.”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에 관해 약간 혼선이 있는 것 같다. 평가액은 3조 원 정도이지만, 시가는 10조 원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치평가에 직접 참여하신 입장에서 말씀하신다면.

“평가액을 2조5,000억 원에서 3조 원 정도로 본다는 건데, 미술품 공정시장 가격을 말하는 거다. 미술품을 팔 때 기타 비용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순순하게 판매액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미술품 가격이라는 게 자동차 가격과 달리, 매매 타이밍과 수요자의 기호 등에 따라 변수가 크다. 그래서 시장에서 호가될 수 있는 가격으로 치면 10조 원에 이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국내외적으로 삼성가에서 소장했던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프리미엄까지 반영된 가격이라고 보면 된다.”

-이건희 컬렉션이 세계적 컬렉션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일각에서는 국내외 명작들을 포괄하는 컬렉션의 다양성, 청동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작품 제작 시기의 통시성, 작품의 질과 양 등을 들어 이건희 컬렉션을 평가한다. 하지만 미술학도로서 나는 이건희 컬렉션을 세계적 컬렉션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글로벌한 컬렉션이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매우 한국적인 컬렉션이기 때문에, 특히 한국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작품들을 독보적으로 갖춘 데 있다고 본다. 포르투갈 리스본에 재산세 내기 싫어서 평생 호텔에서 살았던 아제르바이잔 출신 부호 굴벤키안이라는 사람이 만든 미술관이 있는데, 세계적인 컬렉션으로 꼽힌다. 왜냐. 세계 각지의 미술품을 끌어 모아서가 아니다. 굴벤키안은 고대 페르시아 도자기와 카펫을 집중적으로 수집해 그쪽으로 독보적 내용을 갖췄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건희 컬렉션도 한국 문화사에 맞춰진 선택과 집중, 그리고 문화사의 씨줄과 날줄이 잘 엮인 유기적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

-문화사의 씨줄과 날줄이 잘 엮인 유기적 컬렉션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지금 기증작품 가운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명작으로 꼽히지만, 미술사적으로는 겸재의 전 생애를 거쳐 초년기의 습작기 작품이나 청년기 작품, 노년의 완숙기 작품 등 일련의 맥락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이건희 컬렉션은 시대적으로나, 소장 작가 개인 차원에서나 그런 문화사적 맥락을 갖춘 경우가 많고, 또 기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현대미술관에서 숭숭 구멍이 뚫린 채로 남아 있는 맥락의 공백을 채워줄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가 한국일보 <논담> 인터뷰에서 장인철 논설위원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구성 등을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유족들의 공익기증은 결국 고 이건희 회장의 유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할 텐데,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등 고인의 컬렉션 철학, 또는 고인이 최고의 미술품 수집에 나섰던 뜻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요즘 언론에 고인이 무슨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같은 걸 추진했었다고 하는데, 난 무슨 군사작전처럼 그런 식으로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인은 좋은 작품을 만나면 값을 따지지 않고 과감하게 매입하는 스타일이었고, 그런 흔쾌한 태도에는 개인적으로 고상한 취미만 작용한 건 아니라고 본다. 언젠가 고인은 “명품을 금고에 넣어두고 혼자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취지의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속엔 예술품을 궁극적으로 만인이 함께 즐길 때 가치를 발하는 공공재로 여기는 인식이 투영됐다고 본다. 아울러 그게 허위의식이든 뭐든, 고인에겐 분명히 우리 문화의 수호자라는 자의식 같은 게 있었다고 보며, 그런 의식이 우리 문화재의 해외 반출 차단 및 고려 ‘천수관음보살도’ 같은 해외 반출 문화재 매입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과거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를 비롯해 왜 동서양의 부자들은 예술을 후원하고 미술품을 모아 사회에 기증한다고 생각하는가.

“간단하다. 유한계급(有閑階級), 즉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을 지칭하는 말도 있지 않나.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사는 게 편안해야 고상한 예술에 대한 기호도 생기는 것이고, 돈이 많아야 예술가들 후원도 하고 작품도 살 수 있는 것이니, 부자가 아니면 애초에 컬렉션 같은 건 할 수가 없다. 따져 보면 예술에 대한 후원은 부자들이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기업활동을 통해 사회적 번영을 일구고 고용을 창출하는 게 가장 중요한 기여겠지만, 축적된 재산을 예술이라는 공공재에 투자해 궁극적으로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건희 컬렉션 기증의 사회적 의미도 매우 크다고 본다.”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구성은 어떤가.

“한마디로 방대하다. 청동기시대 원시신앙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방울부터 현대의 마르크 샤갈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종횡의 스케일이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9,797건, 2만1,693점은 미술품만이 아니다. 서적 등을 일컫는 전적류도 4,176건, 1만2,558점이 포함됐다. 43%나 된다. 전적류를 제외한 유물 종류는 도자, 금속, 서화, 민속, 목제, 석제, 토제 등의 예술품이 망라된 거다. 국보 14점, 보물 46점이 포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미술품 종류는 유화, 수묵채색화, 조각, 판화, 공예, 드로잉, 사진, 영상 등의 작품들이 들어 있다.”

-분류 기준별로 이건희 컬렉션에서 가장 손꼽을 만한 작품들을 소개한다면.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이건희 컬렉션 전부가 다 엄청난 명품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최고의 컬렉션이라고 해도 최고 작품은 10% 남짓으로 본다. 나머지 대부분은 단일 작품으로는 이른바 ‘섭치(변변하지 아니하고 너절해 보이는 것)’라고 할 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 섭치들 역시 컬렉션에서 중요한 건, 아까 얘기했듯 정선의 습작기 작품이라도 그게 정선 회화의 전모를 보여주는 씨줄과 날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점을 전제로 말씀드리자면 전통미술 중엔 국보인 ‘인왕제색도’, 다수의 금동보살상, ‘천수관음보살상’ 같은 작품은 더할 나위 없는 것들이고, 근ㆍ현대미술품 중엔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김기창,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등 국내 화가 작품들의 목록이 독보적이다. 글로벌 명품으로는 고갱, 모네, 르누아르, 샤갈, 미로, 달리, 피카소 등의 좋은 작품들이 많다. 개인적으론 이번에 기증된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은 최근 국내에서 42억 원에 낙찰된 것으로 알려진 유사 작품보다도 더 좋지 않나 싶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 등으로 이미 분산 기증했음에도 별도 ‘이건희 미술관’ 설립과 각 지자체별 유치 논란이 뜨거워지면서 소장 및 전시 방안에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하나.

“기증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얘기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번 기증품을 한 군데 모으는 개념의 이건희 미술관 설립론이 대두됐다고 본다. 하지만 대통령 말씀을 좀 더 살펴보면 기증받은 국립 기관 내에 ‘이건희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 등까지 포함해 최선의 방안을 마련하라는 것이지 아예 별도 이건희 박물관을 세우라는 건 아니었다고 본다. 나는 별도 이건희 박물관을 만들어 기증작품을 모두 모으는 건 무리라고 본다. 도자기나 서화, 전적류 등 이종 기증품은 보관과 전시 방법이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도 아니라고 본다.”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국가 박물관ㆍ미술관 큐레이션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본다. 대부분 선진국들의 국가 박물관ㆍ미술관은 ‘고대ㆍ중세(Pre Modern)’ ‘근대(Modern)’ ‘현대(Contemporary)’ ‘동시대(Temporary)’ 등 4종의 별도 전시공간 체제로 운영된다. 우리나라처럼 고대ㆍ중세 유물을 모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나머지를 한데 모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2종으로 운영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 정도에 불과하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우리나라 근대와 현대 작품이 매우 다양하게 포함됐기 때문에 차제에 ‘국립근대미술관’을 신설하고, 이건희 컬렉션도 새 큐레이션 체제에 맞춰 각 박물관ㆍ미술관에 ‘이건희 특별관’ 같은 기증자 전용 전시공간을 구축하는 게 가장 좋다.”

-만약 별도 이건희 미술관 대신 ‘국립근대미술관’을 건립한다면 어디에 세우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보는가.

“지금 이건희 미술관 부지로 거론되는 서울 송현동 부지나, 용산 시민공원 등지도 좋은 후보지다. 아울러 정부서울청사나 혜화동 국립어린이과학관 부지도 미술계에선 거론돼 왔다.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겠다는 지자체가 많은데, 우선 유물과 작품을 제대로 관리할 제반 시설부터 개량된다면, 이건희 컬렉션을 순회전 방식으로 전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설을 갖춘 지방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손꼽을 정도다.”

-이번 기증과정에서 상속세 물납 논의도 적지 않았다. 합리적 가치평가 등 전제조건만 잘 정립된다면 공익적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면이 많다고 본다. 찬반론을 정리하고 본인의 입장을 제시하신다면.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 더 많은 공공기증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상속세 물납은 필요하다. 예술품이 궁극적으로 공공재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다만 물납과정에서 현금가치 평가 등 난관이 없지 않지만, 앞선 나라들의 사례를 참고하면 풀지 못할 게 아니다. 조속히 도입돼야 한다.”


■ 미술평론가 정준모의 추천 컬렉션

김홍도 '필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작가가 사망 1년 전인 1805년에 그린 작품.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지은 '추성부'의 장면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 전 세계에 현존하는 고려불화 170여 점 중 유일한 '천수관음도'이다.


청전 이상범 '무릉도원도'(1922). 작가가 25세에 후원자 이상필의 요청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지금까지 실물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백남순 '낙원' (1937). 작가는 한국 서양화 도입 첫 세대의 여성작가로 서양화 양식과 전통적 한국화 양식을 절충하여 창안한 그림을 그렸는데 '낙원'은 작가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이다.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작가가 1950년대 그린 대작. 달 항아리에 행복과 희망을 담으려는 반라의 여인들이 도자기를 닮아 보인다.


장욱진 '공기놀이'. 작가가 양정고보 재학시절에 그린 1938년작. 인물의 윤곽선은 단순화되고 세부묘사는 과감히 생략되어 작가의 초기 작품성향을 잘 보여준다.


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꽃과 연인들을 자주 그렸던 작가의 1975년 작. 정준모는 최근 국내에서 경매돼 42억 원에 낙찰된 유사작보다 "더 좋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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