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첫 피아노 연주

입력
2021.05.30 22:00
27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좁은 방마다 낡은 피아노가 한 대씩 놓여 있는 동네 학원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형과 누나들이 하농이나 체르니를 서투르게 치고 있었다. 피아노는 페달이 고장나고 꼭 안 눌리는 음이 하나씩 있었지만, 학원 입구부터 제각기 딩동거리는 소리만으로 설렜다. 낯선 동네를 지나다 우연히 들려올 때마다, 고사리손으로 건반을 바둥거리며 누르는 아이들이 연상되는 동네 피아노 학원 특유의 소리. 나는 그곳에서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다.

인생의 첫 피아노는 할머니가 사주셨다. 건반을 눌러서 소리를 내는 일이 너무 신기했다. 손 모양이 예뻐야 한다면서 계란을 쥐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하농과 바흐와 체르니 100번과 피아노 명곡집에 연필로 표시해가면서 연습했다. 하지만 다른 어린아이처럼 얼마 못가 피아노에 싫증이 났다. 선생님이 연습할 때마다 하나씩 지우라고 그려주신 사과를 두 개, 세 개씩 지우는 일이 예사였다. 그렇게 간신히 중학교 3학년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아니, 어머니가 시키니까 견뎌냈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넘쳤다. 살림은 검소했지만 자녀 교육에는 전혀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철이 없는 아들은 불만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놀고 싶었다. 차라리 그 돈을 나를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단호한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던 어느 날 물었다. 나는 피아노에 대단한 소질도 없고 직업이 될 수도 없는데 왜 이걸 연습해야 하냐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중에 네가 멋진 사람이 되면, 피아노를 연주하면 사람들이 좋아해줄 거야. 엄마는 아들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성인이 된 아들은 조금씩 철이 들었다. 십 년이나 배운 피아노를 그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아까웠다. 집에 있던 피아노를 꾸준히 연습했다. 새로운 곡도 찾아보았고 가끔은 녹음도 해보았다. 결혼식에 축가 연주를 하거나 친구들 앞에서 연주할 일이 종종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아마추어 밴드에서 건반으로 몇 년 정도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한다. 놀랍게도 방송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도 생겼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루는 혼자 사는 집에 어머니가 방문했다. 당신은 언제나처럼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 넣고 걸레로 바닥을 닦으셨다. 좋은 청소기가 있어도 어머니는 삼십 년 전처럼 주저앉아 바닥을 닦으신다. 나는 어머니가 오신 기념으로 피아노를 열어 간단한 곡을 연주했다. 약간은 우아해진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묵묵히 걸레질을 하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내게 피아노를 악착같이 가르쳤지만 그것은 전혀 어머니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했지, 어머니를 위해 연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왜 부족한 살림을 덜어 나를 가르치셨을까. 삼십 년 뒤 아들의 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걸레질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지금은 투정만 부리는 아들이 훗날 어디서나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설명은 너무나 부족하다. 어머니의 마음은 유일한 것이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도 그 연유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더 들었지만, 어른이 되는 길은 너무 멀어 아직 한참 저편에 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