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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아들의 진료 내내 어머니는 죄인 된 표정이었다

입력
2021.06.08 21:00
수정
2021.06.08 22:14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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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준혁 소아치과 전문의·의료윤리학자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치과 진료 의자 아닌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치과대학을 나와 병원에서 전문적 수련을 받은 의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 싶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들의 첫 마디는 보통 “그런데 진료는 안 하세요?”다. 어쩌다 이러고 있는지, 가끔은 한숨도 나온다. 되돌아보면 우연이라 말해야겠지만, 그 시작점에는 수련의 시절 만난 한 발달장애 환자의 보호자도 있다.

소아치과는 이름 그대로 아이들을 진료하는 치과의 한 분야이지만, 장애인 진료를 맡는 경우도 있다. 치과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잘 달래면서 치료하는 방식은 장애인, 특히 발달장애나 뇌병변장애를 지닌 환자를 진료할 때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시각·청각장애를 지닌 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앞이 보이지 않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치과 의자에 누워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두려움은 배가 될 테다. 또, 여러 장애 환자 중에서도 특히 발달장애의 경우는 간단한 진료조차 쉽지 않은데, 환자의 주의를 돌리면서 빠르게 검사하고 때론 힘을 써서라도 신속하게 필요한 처치를 해내는 기술이 중요하다. 아이를 진료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힘은 더 든다.

그 발달장애 환자는 궁금한 게 무척이나 많아 보였다. 주변을 비스듬한 눈길로 여기저기를 계속 보고 있었다. 환자 어머니는 내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환자와의 긴 씨름 끝에 검진이 끝났고, 나는 어머니에게 그의 구강위생 관리가 미흡하며 이런저런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환자의 어머니는 말했다.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날 일과는 그렇게 평상시처럼 끝났다. 하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환자 어머니는 뭐가 그리도 죄송했던 걸까. 내가 검진하는 동안 아들에게 손가락을 씹히고 여기저기 맞은 게 미안해서? 보호자로서 아들의 구강위생 관리를 잘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난 한참을 지나서야 배우게 되었다. 환자 어머니의 "죄송합니다"란 평범한 말이 너무도 복잡한 의료 현실과 도덕적 위계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질병의 표준적 정의는 (정신을 포함한) 신체에서 발생한 기능장애와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다. 생각해보자. 발달장애 환자의 불량한 구강위생 상태와, 이로 인해 치아와 잇몸이 망가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물론 이를 잘 닦지 못해 세균이 증식하고, 그 세균이 독소를 만들어 낸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만약 환자가 이를 잘 닦지 못한 이유가 발달장애 때문이라면, 충치와 잇몸 질환도 발달장애의 일부로 봐야 하는 것일까.

또, 치료란 발생한 질병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건강에 대한 관리책임을 부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구강 건강의 책임, 즉 입안에 생긴 충치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운다. 하지만, 발달장애 환자의 경우 누가 구강의 책임을 지는가? 환자인가 아니면 보호자인가? 만약 발달장애 자체가 충치의 원인이라면 이들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자 어머니가 죄송해야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어머니 표정이 계속 떠오르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부지불식간에 난 모든 책임을 그 어머니에게 전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애가 있는 아들의 치아 관리를 왜 이렇게 했냐고 어머니를 질책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과연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우리는 질병을 이유로 만난 환자와 보호자와 의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의료적 위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환자와 보호자의 '우위'에 서서 그들을 평가하고 책망하고 있었다.

그게, 공부를 시작한 이유였다. 나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려 했다. 치료행위가 환자와 보호자보다 우위에 선 의사의 '시혜'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인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가 가능한지 알고 싶었다. 서로가 각자 자리에서 행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나는 의료인문학을, 의료윤리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 아마, 그 보호자와의 만남이 운명이었을 거다.

오랫동안 우리는, 의료에 늘 한 가지 정답만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예컨대, 의료는 누가 뭐래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의료적 상황 앞에서 각자의 필요, 가치, 원칙을 가지고 나아간다. 연명의료나 임신중절 관련 논쟁에서,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을 배운다. 코로나19를 둘러싼 진통 속에서 우리는 감염병의 빠른 해결만이 능사가 아님을, 확진 환자 정보공개나 백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확인한다. 장애인의 권리와 치료를 둘러싼 여러 주장에서 우리는 장애를 무심코 열등한 것으로 여겨왔음을 깨닫는다.

의료는 병의 소멸만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는 분명 좋은 삶을(때로는 좋은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 의료윤리는 무엇이 옳은지 미리 결정해주는 대신, 여러 요구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더 좋은 삶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려면 환자는 의료인에게, 의료인은 환자에게 더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만은 의료윤리가 말해줄 수 있는 분명한 답이다.

한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타인의 얼굴, 환자의 얼굴이 내 삶을 바꾸었다. 그래서, 난 드릴과 메스 대신 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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