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부대' '머니게임' '모범택시' 인기의 공통점
'소확행'에서 '악으로 깡으로'?
대중문화 화두의 변화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시대의 강요
개발시대 세계관에 MZ 세대가 열광
'사나이'의 소환... 시대의 역설
SKY채널·채널A 예능프로그램 '강철부대', 유튜브 예능 '머니게임', SBS 드라마 '모범택시'. 요즘 TV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콘텐츠들이다. 인기의 공통점은 뭘까. 출연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비루해도 괜찮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코로나19로 삶이 더욱 팍팍해지면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통한 대리만족의 효력은 뚝 떨어졌다. 요즘 대중문화에서 주목받는 소재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다. 캠핑카를 끌고 숲에서 몸을 누이는 낭만(tvN '바퀴달린 집')보다 살아남기 위해 극렬하게 몸부림치고, 복수하는 이야기가 화제다.
수세식 양변기도 없고, 물도 나오지 않는다. 밀폐된 공간에 8명이 모여 14일 동안 극한의 상황을 버티며 최종 1인으로 살아남아야 상금(4억8,104만 원에서 시작)을 손에 쥘 수 있는 '머니게임'에서 인간성은 모래성처럼 쉬이 무너진다.
"사람이세요?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요." "어차피 싸우고 개판 되고 제작진이 만든 룰이잖아. (상금을 써 정보를 얻어) 그걸 미리 알게 된 거고, 어쩔 건데 씨X." 상금이 갑자기 줄어들자 남녀 출연자는 서로 악을 쓰고 달려들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는다. 기존 방송에선 다루기 어려운 '막장 전개'로 입소문이 나면서 '머니게임'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27일 기준, 마지막 회가 올라온 지 일주일여 만에 조회 수 5,600만 건(총 8회)을 돌파했다. 누적 조회수를 우리나라 인구수(5,100만 명)와 단순하게 비교하면 시민 1명당 한 번씩은 이 영상을 돌려봤단 얘기다. 돈 앞에서 흔들리며 비루해지는 사람들의 민낯,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악다구니를 보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진흙탕물이 믹스커피, 맛있다" 유행어 된 이유
'제2의 가짜 사나이'로 기대를 산 '강철부대'는 극기의 끝판왕으로 인기다. 군사경찰 특수임무대(SDT),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707특수임무단, 해군 특수전전단(UDT), 해난구조전대(SSU), 해병대 수색대 등 6개 부대 출신 예비역들은 출신 부대별로 팀을 꾸려 미션을 수행하며 최종 우승을 가린다.
그들의 몸은 쉴 틈이 없고, 마음은 늘 불안에 쫓긴다. 참호 육탄전, IBS(소형 고무보트) 침투 작전, 대테러 구출 작전 등을 낮밤 가리지 않고 수행하며 때론 부상도 입는다. 신체적·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이들은 자부심과 전우애로 꽉 차 있다.
"아, 믹스커피 맛있다!" 참호에서 육탄전을 벌이던 특전사 박준우는 흙탕물을 입에 넣고 가글을 한 뒤 그 물을 뿜어내며 호기를 부리고, 그가 외친 이 말은 온라인에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낯선 예비역들이 군대 예능에 나와 악으로 깡으로의 진면목을 보여준 '강철부대'는 '국민 MC' 유재석이 나오는 MBC '놀면 뭐하니?' 등을 제치고 TV 예능프로그램 화제성 1위(5월 1~2주·TV 화제성 분석기관 굿데이터코퍼레이션)로 떠올랐다. 집단 문화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MZ 세대(1980~2000년대생)들이 부대 즉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본 결과다. 아이러니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강철부대' 25일 20~49 시청률은 같은 날 같은 채널에서 방송했던 건강프로그램 '나는 몸신이다'보다 무려 15배 높았다.
깡다구로 철갑 두른 소시민의 '무한 복수'
'모범택시'의 주인공들은 '복수 대행'을 위해 독기가 잔뜩 올라 있다. 'n번방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 등 피해자들이 연대해 택시회사를 만든 뒤 그 택시를 활용해 법이 지켜주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를 대신해 악을 쓰며 복수한다. 복수에 자비는 없다. 그들은 사법 체계를 비웃으며 악을 악으로 응징한다. 아동성범죄자 조두순을 연상케 하듯 아동성폭력을 저지르고 심신미약으로 짧은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조도철(조현우)을 김도기(이제훈)가 납치해 사제 감옥에 가둔다. 피해자를 돕는 조직인데 그 방식은 가해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깡다구로 철갑을 두른 소시민의 사적 복수에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모범택시'는 시청률 0%대로 고전하는 지상파 드라마 중 이례적으로 15%(22일 기준)를 웃돌며 인기다.
IMF 때 '국토대장정' 유행처럼
공정과 일과 삶의 균형, 조직보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에 뜬금없이 군인에게나 요구될 법한 악과 깡으로 범벅이 된 콘텐츠가 왜 인기일까. 팬데믹으로 더 냉혹해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사회가 더 커진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강요하기 때문"(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이다. 코로나19로 취업 문이 좁아진 20~40 'N포세대'에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요구하는 '착한 콘텐츠'는 공감대를 점점 얻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 환영받는 시대정신은 악, 깡, 끈기 그리고 각자도생이다"(박생강 작가). 올드미디어(TV)뿐 아니라 뉴미디어(OTT)에서 이런 20세기 개발시대 세계관(악과 깡)을 다룬 콘텐츠가 각광받는 배경이다.
파이팅 있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시청자는 누군가의 고행을 통한 자극을 점점 더 원하는 분위기다. "IMF 위기 때 '국토대장정'이 유행했던 것처럼"(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 고통의 미러링(모방 행위)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혹독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제작이 잇따르고, 반응은 뜨겁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사적 복수를 하는 하는 것은 미덕('모범택시')처럼 여겨진다. 젠더 감수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고통을 악으로 견딜 '진짜 사나이'가 이곳저곳에서 소환되기도 한다. 대중문화 유행이 보여준 시대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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