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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공백이 비추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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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공백이 비추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

입력
2021.05.27 14:40
수정
2021.05.2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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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30일까지 LG아트센터

연극 '그을린 사랑'의 대사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함께'다. 주인공 나왈(이주영 분)은 "이제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다짐하며 가혹한 운명을 버텨낸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그을린 사랑'의 대사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함께'다. 주인공 나왈(이주영 분)은 "이제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다짐하며 가혹한 운명을 버텨낸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그을린 사랑'은 공연 시간이 무려 3시간 30분에 달한다. 웬만한 뮤지컬이나 오페라보다 길고,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 '반지의제왕' 시리즈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예매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인터미션도 한 번밖에 없어서 긴 시간 인내심을 요구한다.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Incendiesㆍ2003)'이 원작이다. 2010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긴 공연 시간만큼 서사적인 면에서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연극은 아니다. 캐나다에서 생을 마감한 중동 출신의 여인 나왈이 겪었던 질곡의 삶이 주제다. 그 세월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전쟁과 테러, 고문 등 한 인간이 인내해야만 했던 갖가지 수난으로 점철돼 있다. 나왈의 쌍둥이 자녀 잔느와 시몽은 엄마의 유언을 따라 여행을 하는 동안 인간이 만든 역사의 참상을 마주한다. 특히 나왈이 실어증에 걸리게 된 사건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극이어서 신화적일 정도다.

'그을린 사랑'은 나왈의 아들 시몽(이원석ㆍ왼쪽)과 딸 잔느(황은후ㆍ오른쪽)에게 엄마의 유언을 전달하는 에르밀 르벨(남명렬)의 이야기로 막이 오른다. LG아트센터 제공

'그을린 사랑'은 나왈의 아들 시몽(이원석ㆍ왼쪽)과 딸 잔느(황은후ㆍ오른쪽)에게 엄마의 유언을 전달하는 에르밀 르벨(남명렬)의 이야기로 막이 오른다. LG아트센터 제공

시사점이 적지 않다. 나왈을 둘러싼 난민과 민병대의 전쟁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분쟁을 똑 닮았다. '그을린 사랑'의 신유청 연출은 '우리사회가 근대를 통과하며 수많은 고난이 있었고, 그 순간 '망각'과 '기억'이 대립했다'는 소설가 황석영의 말을 인용하며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을린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연극계 블루칩'으로 통하는 신 연출의 작품답게 무대 구성이 독특하다. 1,000석이 넘는 대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는데도 이렇다 할 세트가 없다. 사무실 책상이었다가 벽이 되고, 무덤의 관으로도 기능하는 테이블 등 소품 몇 점이 이따금 등장할 뿐 무대는 시종일관 공허하다.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는 한지 위의 붓글씨처럼 또렷하게 다가온다. 신 연출은 "연극이란 무엇보다 잘 들려야 하고, 잘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을린 사랑'은 잘 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국적이고 시적인 대사들에 주목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을린 사랑'의 무대는 공백으로 가득 차 있다. '잘 들리기 위한 무대'를 추구한 신유청 연출의 철학이 나타난다. LG아트센터 제공

'그을린 사랑'의 무대는 공백으로 가득 차 있다. '잘 들리기 위한 무대'를 추구한 신유청 연출의 철학이 나타난다. LG아트센터 제공

2012년 국내 초연된 '그을린 사랑'은 지난해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30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7월에는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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