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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버전 ‘말아톤’... 이승민의 무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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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버전 ‘말아톤’... 이승민의 무한 도전

입력
2021.05.22 06: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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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발달장애 3급 프로골퍼
2017년 KPGA 정회원 자격 획득 이후
'조력자 동행 금지' 2부 투어 벽에 중국행??
5월부터 국내도 동행 허용…"미국 도전"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왼쪽)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자신의 캐디를 맡고 있는 윤슬기씨와 활짝 웃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왼쪽)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자신의 캐디를 맡고 있는 윤슬기씨와 활짝 웃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엔 1부보다 2부 투어에서 경기하는 걸 더 힘들어했던 선수가 있다. 1부 투어는 선수마다 캐디가 동행하는 반면, 2부 투어에선 선수별 개인 조력자 동행이 불가했던 이유에서다. 발달장애 3급으로, 누군가의 조력을 받아야만 원활한 플레이가 가능했던 프로골퍼 이승민(25ㆍ하나금융그룹) 얘기다.

골프공 날아가는 모습이 너무 좋았던 이승민

이승민은 18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공이 ‘쓩~’ 날아가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 골프에 빠졌다”고 했다. 그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건 아버지 직업상 미국에서 살았던 1997년이다. 세 살이 채 안 된 이승민의 산만함은 타이거 우즈(46)의 플레이가 중계될 때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초등학교 때 단체운동인 아이스하키를 했던 이승민은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골프채를 잡고 선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발달장애 마라토너 윤초원(조승우 분)의 성장기를 담은 2005년 개봉 영화 ‘말아톤’ 이야기처럼, 골프에 놀라운 집중력과 흥미를 보인 이승민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가르침을 이해하는 건 더뎠지만, 한 번 습득하면 기가 막히게 자신의 장점을 키웠다. 이승민의 어머니 박지애(55)씨는 “승민이는 치료와 교육 목적으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아이가 골프를 통해 비장애인들과 어울리며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후원사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후원사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씨는 “한국에 와선 골프학과가 있던 신성중·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승민이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승민이가 연습장에서 스윙을 하고 있는 선배나 친구, 후배들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시하려고 뒤로 불쑥 다가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며 “승민이를 약 올리는 형이나 동기들에게 갑자기 분기탱천해 달려들어 주변 사람들이 간신히 뜯어말리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KPGA 정회원 자격 얻었지만... 더 높은 벽을 만났다

위기도 많았지만, 이승민은 기어코 2017년 4월 발달장애 선수론 처음 KPGA 정회원 자격을 획득했다. 이승민은 그 날 “엄마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인사했다”고 했고, 엄마는 “그 인사를 듣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말했다. 두 달 뒤 충남 태안군 로얄링스CC(당시 현대더링스CC)에서 열린 KPGA 정규투어 카이도 골든 V1 오픈에 초청 선수로 출전, 데뷔 첫 홀에서 이글을 기록했다. 이듬해 개막전으로 열린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에선 처음으로 컷 통과에 성공하면서 189만 원이란 값진 상금을 탔다. 골프선수로선 처음 스스로 벌어들인 정규투어 상금이다.

그가 1부 투어에서 경쟁력을 보이면서 발달장애 선수에 대한 벽도 서서히 허물어질 줄 알았지만, 이승민은 그 해까지 주로 뛰던 2부 투어 무대에서 높은 벽을 실감했다. 박씨는 “여러 선수가 한 명의 캐디를 두고 플레이해야 하는 규정상 이동과 거리측정, 클럽선택, 코스 전략수립 등 모든 걸 홀로 해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승민이가 포함된 조의 플레이 진행이 더뎌졌고, 동반자들의 인내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왼쪽)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자신의 캐디를 맡고 있는 윤슬기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왼쪽)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자신의 캐디를 맡고 있는 윤슬기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결국 이승민이 2019년 활동 무대로 택한 곳은 중국 프로골프 투어였다. 2017년부터 이승민의 캐디를 맡은 윤슬기(41)씨는 “퀄리파잉 토너먼트(QT)를 치러 뛰게 된 중국은 의외로 한국보다 발달장애 선수가 뛸 수 있는 여건이 잘 갖춰졌다”고 했다. 윤씨는 “영국왕립골프협회(R&A) 골프 규칙에 관한 공식 가이드에 따르면 지적 발달장애를 가진 선수는 조력자나 감독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중국을 포함한 미국·일본 등에선 적용돼 온 이 규칙이 한국에선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미디어의 관심도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높았다고 한다.

"희망이 되고 싶다" 국내 무대 벽 허물고 미국 도전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부터 국내에 머물렀던 이승민에게 올해 선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KPGA가 2부 투어에서도 발달장애 선수의 조력자 동행을 허용하기로 규정을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정은 17일 군산CC에서 열린 2021 스릭슨 투어(2부 투어) 6차 대회에서부터 적용됐고, 대한골프협회(KGA)도 이달 말로 예정된 코오롱 63회 한국오픈 예선부터 발달장애 선수의 조력자 동행을 허용했다.

앞으로 프로에 도전할 발달장애 선수들의 진입장벽을 낮춰 놓은 이승민은, 더디더라도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큰 무대로 향할 계획이다. 그는 “다음 달 개막하는 코리안투어 데상트코리아 먼싱웨어 매치플레이에 초청 받아 128강전을 치르고, 하반기 미국 콘페리투어(2부 투어) 무대에 도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국 투어 목표를 묻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고 던진 그의 답변은 또렷했다. “나 같은 선수들이 세계에 많을 거예요. 그런 선수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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