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구봉산에 신라 삼국통일의 열쇠가 있다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화성 구봉산에 신라 삼국통일의 열쇠가 있다

입력
2021.05.22 11:00
수정
2021.05.22 14:18
0 0
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 대중 교류의 관문이었던 화성 당성

경기 화성시 구봉산 위에 자리 잡은 당성의 전경. 바다 쪽에서 내륙 방향으로 본 항공사진


당성이 항구라고?

아마도 당성 아래에 사는 사람들조차 입을 쩍 벌릴 주장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고대 산성을 항구도시라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를 보면 엉터리라고 손가락질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 경기 화성시 구봉산 위에 자리잡은 당성은 분명히 삼국시대에 항구도시를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산성이다. 성터에서는 고대 신전이었을 '팔각건물지'가 발굴된 바 있다. 원효 대사의 유명한 설화를 기억해보자. 의상대사와 중국 유학을 위해 이곳으로 오는 중에 어느 굴 속에서 잠 자다 목이 말라 물을 아주 달게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음을 발견한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구나’라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경주로 돌아가고 의상만 중국으로 향했다는 이 이야기에서 당시 신라 사람들이 중국을 가려면 이 항구를 통했음을 알 수 있다.

망해루지에서 내려다보는 서해 바다. 돌로 표시된 곳이 기둥 자리다(왼쪽 사진). 망해루지 동편에 위치한 팔각건물지. 근처에 관아 및 객사 건물지도 위치한다(오른쪽 사진).


당성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비봉나들목에 내린 뒤 서쪽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서신 방향으로 오면, 이 지역의 거점도시였던 남양(南陽)을 지난다. 남양은 홍(洪)씨의 본향이다. 시조가 중국에서 와서 당성을 쌓았다는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선덕여왕 때에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해진 기록이 있다. 남양에서 활어시장으로 유명했던 사강을 지나면서 제부도로 향하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구봉산 자락을 마주한다. 완만한 산 언덕을 지나 짧은 터널을 통과하면 곧바로 오른쪽에 최근에 개설된 당성 안내소가 보인다.

당성 배치 지형도. 1차성 동쪽을 확장해 2차성을 지었다

당성은 1971년 국가사적 217호로 지정됐지만 그 역사적 실체는 2000년대 초부터 올해까지 7차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확인되었다. 구봉산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望海樓)를 중심으로 테뫼식 1차성을 쌓고 이후 확장해서 성의 동문이 있는 골짜기를 둘러싼 2차성을 구축한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연결된 산성의 총 길이는 1차성과 2차성을 합쳐 1,500m가 넘는다. 경기도 해안지역 일대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고, 겹배수통로가 깔린 동문지의 구조를 볼 때 탄탄하게 만들어진 성이다. 당성 내부에 저수지가 있고, 관아 건물과 온돌이 깔린 큰 집터가 발굴된 것을 보면 상시 거주인원이 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성의 동문지 아래 2중으로 배열된 배수 통로


당성, 신라 삼국통일의 열쇠

당성(唐城)은, 그 아래에 위치한 당은포(唐恩浦)에서 당나라로 가는 성이라는 뜻일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성이다. 그동안 당항성의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었지만, 발굴된 유물로 미뤄 볼 때 당성이 바로 당항성일 것이다. 삼국의 역사를 바꾼 바로 그 성이다.

삼국이 이 좁은 한반도에서 경쟁할 때는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다. 삼국이 항쟁하면서 백제와 황산벌 전투의 화랑 관창의 이야기,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죽음, 바둑으로 망한 개로왕의 이야기, 그리고 성왕의 관산성 전투의 전사 등은 각 나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고 잊지 못한 회한을 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광개토대왕비 등의 기록에 '형제'라는 표현을 남긴 걸 보면 핏줄이 당기기도 했던 필연적 운명의 고대 삼국이었다. 오늘날 남북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라고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당성 일대의 위성 사진. 서해와 인접해 있다.

신라는 대륙과의 교류로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라 할 수 있는 영남 지역에서 발흥했다. 잦은 왜구의 침략 때문에 문무왕이 죽으면서도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며 감포 바닷속에 묻힌 것 아닌가. 오늘날 반일과 극일을 부르짖지만 신라시대에도 도움을 받고서도 약탈하러 오는 왜구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신라는 나라를 현대화하기 위해 당나라에 가려 해도 지리적 여건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백제나 고구려 사신을 따라서 다녀왔는데 2등 사신이라는 서러움이 사무쳤을 것이다. 정복 군주로 알려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한 것은 당나라와의 교역로 개척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의 명운을 쥔 건곤일척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동문지 바로 안쪽에 위치한 저수지(왼쪽 사진)와 1차성 건물지에서 출토된 온돌 유구

당항성이 있던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이후 고구려가 취하여 그 명칭을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적고 있다. 시화만의 모양을 노루 주둥이에 빗댄 지명으로 보이는데, 정작 고구려 흔적이라고는 기와의 문양에서 힐끗 보이는 정도이다. 애초 백제의 성이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당시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DMZ, 즉 완충공백지에 해당한 당항성을 553년 신라가 라제동맹을 깨고 전광석화같이 차지했을 것이다. 후에 크게 후회한 의자왕이 성을 회복하려 공격을 준비하다 첩첩의 방어망에 포기한 것을 보아도 백제에게는 계륵(鷄肋) 같은 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의 실크로드 관문 당성 지키기

신라는 하이에나와 같이 한번 물었던 것을 통일 때까지 놓지 않았다. 당성을 차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영남에서 이곳으로 오는 교통로상의 모든 큰 성들, 보은의 삼년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죽산의 죽주산성, 용인의 할미산성 등을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새로 쌓음으로써 경주와 당성을 잇던 길의 안전성을 확보했다. 북으로는 고구려 침공에 대비해 멀리 임진강을 건너는 길목에 칠중성을 쌓았고, 당성 주변 곳곳에도 성을 쌓았다. 역사 기록에도 없는 안산의 성태산성 역시 이 즈음에 축조됐다. 요즘 이스라엘이 언 돔을 만든 것과 비슷하게 이 성으로 가는 모든 교통로에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다. 그만큼 당성은 신라인들에게 중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동문지 성벽 구조. 낮은 지대에 해당해 수해 피해가 잦았던 듯하고 지속적으로 보강한 흔적이 보인다.

세상을 통일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원대한 계획과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경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는 현실에서 국제적인 감각이 뒤떨어졌던 신라의 진흥왕이 세웠던 한반도 통일 경영전략은 새삼 시대적인 화두가 될 만하다. 당성은 중국 당나라를 이용해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와의 일전 후에 한반도를 제패한 전략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또한 당성은 국제 학자들에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적인 가치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성에서 중국의 산동지방과 낙양, 시안까지 연결되는 동아시아 실크로드, 즉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문화 교류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명문(銘文) 기와가 말하는 것들

당성에서는 서울 부근의 고대 성 가운데 문자가 찍힌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성에서 기와가 출토되는 것은 그만큼 큰 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와 지붕이 있는 집은 보통 아주 중요한 관청이고, 그래서 ‘관(官)’ 또는 ‘택(宅)’자가 들어간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많다. 이러한 기와의 명문을 통해 다양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당(唐)·택(宅)명 기와, 한산(漢山)명 기와, 본피모(本彼謨)명 기와, 웅천(熊川)명 기와.

가장 놀라운 것은 당성을 의미하는 ‘당(唐)’자가 들어간 기와가 출토된 것이 경덕왕 때에 당성으로 명칭을 바꿨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산(漢山)’ 명문 기와는 당성이 한산주(한강 유역 일대)의 서쪽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당시 신라 경주 6부의 하나였던 본피(本彼)에서 파견된 사람이 점령 이후에 성 축조를 감독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올해 발굴에서 나온 '웅천(熊川)' 명문을 통해선 삼국통일 이후 웅천 지역에서 만든 기와가 이곳 건물을 개수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을 발굴하는 동안 백제의 흔적은 토기 두 점에 불과했다.

1차성지 가장 아래층에서 발굴된 백제양식 토기. 유일한 백제의 흔적이다.


망해루의 로망

당성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는 고려 말 남양부사였던 정을경(鄭乙卿)이 신축하고 스승이었던 목은(牧隱) 선생의 글을 받아 망해루기를 남겼다. 그러나 발굴을 통해 신라 점령 초기부터 망해루 위치에 건물이 있던 것이 확인되었다. 망해루지에 서면 왜 이 성을 항구라고 했는지, 왜 과거에 최치원이 방문하여 선대왕을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며 시를 남기게 됐는지 알 만하다. 서해안의 고대 성터의 꼭대기에 서면 북으로는 서울의 자락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서해 위에 제부도 같은 섬들이 떠 있다. 옛날 같으면 넓은 갯벌 사이의 수로 곳곳에 자리 잡은 포구들, 대원군의 한이 서린 마산포, 당은포, 은수포와 성 바로 맞은편의 화랑진에 사람들이 붐볐을 것이다. 이제 그 수로는 땅으로 변해 공장이 들어서 있다. 다만 서남쪽에는 멀리 제부도의 바다 풍경이 아련하게 보인다.

당성 망해루지에서 제부도 방향으로 내려다보는 서해 낙조

신라 시대 중국으로 떠나는 이를 송별할 때는 이곳 망해루에서 바다를 보며 흙으로 만든 말을 깨트리면서 장도(壯途)를 빌었을 것이다. 반대로 중국에서 귀한 손님이 들어오면 1차성지에서 발견된 전면 9칸의 기와집 영빈 숙소에 머물렀을 것이다. 몇 해 전 성안 건물지에서 8세기경의 중국 형요(刑窯)산의 백자 대접과 차 대접 두 점이 겹쳐 출토됐는데, 당시 손님이 가지고 온 귀했던 중국 도자 접시일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종류의 접시가 익산 미륵사지나 경주 황룡사지에서도 발굴된 바 있다. 서해 제부도의 낙조를 내려다보며 차를 음미하면서 바다 건너 등주에서 요동과 황해도 끝 장산곶을 돌아온 기나긴 황해 여정의 여독을 풀었으리라. 그 맛을 상상하면서 오늘날 코로나로 지친 우리 마음을 풀어주는 역사 이야기가 되었길 바란다.

당성에서 출토된 중국 형요산의 백자 대접(왼쪽)과 기타 토기 및 자기 파편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인터랙티브] 반려동물 코로나시대의 위로가 되고 있나요? [인터랙티브] 반려동물 코로나시대의 위로가 되고 있나요?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