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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입력
2021.05.13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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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 AFP 연합뉴스

배우 윤여정. AFP 연합뉴스


아마 너무 많은 축하를 받으셔서 저의 축하 편지가 식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세계 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의 로컬 시상식인 아카데미에서의 역사적 수상에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미나리'의 작품성과 선생님의 연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훌륭하지만, 사실 선생님은 오랫동안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들에서 이미 더 증명할 필요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셨지요. 사실 선생님께 오스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간 인종주의적이고 영어-미국중심적인 편협성으로 비판받아왔던 아카데미에 선생님이 훨씬 더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안 혐오의 광풍이 부는 이런 시절에 한국인 여성이라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오스카를 수상하셨다는 것은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수많은 아시안들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서구권 미디어에서 동양인들은 백인과 마찬가지의 '사람'으로도 제대로 재현되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 역시 같은 한국인으로서도 기쁘지만, 이를 그저 '한국인의 자랑', '한국영화의 쾌거'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이번 수상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미나리'의 할머니가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며 'K할머니'라는 이름을 붙여 선생님을 'K할머니'의 대표로 부르는 것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사실 '미나리'의 배역 '순자'만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윤여정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현상'에 가까운 인기가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국의 시상식들에서 그 누구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으셨고, 특유의 솔직 담백한 소위 '뼈 때리는 팩트 폭행'으로 영어 쓰는 외국인들에게 주눅 들어 살았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 세월 동안 쌓인 '집단적 설움'을 보상받는 듯했어요.

무엇보다도 저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이 혼자 자녀들을 키워낸 워킹맘 배우로서 노년에 큰 성과를 올리셨다는 점이 너무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이혼 후 TV 드라마에 복귀했을 때, 어른들이 이혼녀라고 수군거리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대체 왜 스치듯 들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응원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과는 이혼에 대한 인식이 정말 달랐던 세상이었지요. 선생님은 여성에게 잔인했던 그 시절을 버티고 살아내셔서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다양하고 파격적인 역할들로 연기 커리어를 쌓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의 연기를 보며 자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늙는다는 것이 그저 무섭기만 했던 저에게 선생님의 모습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든 여성은 ‘희생하는 숭고한 어머니’라는 방식 이외에는 어떤 긍정적인 존재가치도 가지지 못했었는데, 선생님이 이 땅의 여성들에게 이혼한 싱글맘도 자신의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셨어요. 사실 오스카 수상 같은 큰 성공보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더 큰 희망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매력과 개성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멋진 '노년의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나이 드는 것이 조금은 덜 무서워졌습니다. 오래도록 작품에서 뵙고 싶습니다.



이지영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BTS예술혁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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