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 지우다 타투이스트 된 의사 “자기대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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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 지우다 타투이스트 된 의사 “자기대로 사세요”

입력
2021.05.14 09:10
수정
2021.05.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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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4>조명신

쌍꺼풀 수술하다 이젠 타투를 전문으로
남극 파견, 문화인류학 박사과정, 미술까지
“한 번뿐인 삶인데 하고 싶은 건 해야죠”

의사로는 드물게 타투이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조명신 원장을 6일 서울 중구 빈센트 의원에서 만났다. 그가 타투 머신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신에 겨운 삶을 신봉하는 사람. 표정과 눈빛에서도 신이 묻어난다. 그 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화장실에서조차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하는 이런 질문. ‘이거, 내가 원하는 삶이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한정돼 있다는 무서운 진리를 깨친 덕분이다. 조명신(57) 빈센트의원 원장의 이름 앞에 붙은 ‘의사’ ‘타투이스트(문신사)’ ‘문화인류학 박사 과정생’ 같은 정체성이 이를 증명한다. 청년기에 의대 진학을 후회하며 ‘가지 않은 길’을 선망했기에 이후의 삶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리라 몸부림친 결과인지도.

현재 그를 설명하는 주된 수식어는 의사 혹은 타투이스트인데, 그것도 범상치 않다. 일반의로는 드물게 성형수술을 하던 그에게 문신은 ‘지워야 하는 상처’였다. 과거 몸에 했던 문신을 없애려고 찾아오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타투를 시술하면서는 ‘상처를 지우는 매개’가 됐다. 화상 같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지닌 흔적 위에 문신으로 새로운 이야기와 상징을 덧씌우는 거다.

성형수술도, 문신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의 과정인데 즐거움은 완전히 달랐다. “지금까지 한 쌍꺼풀 수술 3만 건은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한 문신은 다시 보면 생생히 떠올라요. ‘아, 이 부분 긋다가 살짝 삐끗했지’ 하는 것까지도.” 그는 문신을 할 때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바코드처럼 박히는 듯하다고 했다. “같은 문신은 없거든요.” 문신에 입힐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그의 몫. 그러니 문신마다 그가 담긴다.

시술 방식에도 그만의 서사가 있다. 소방관이나 코로나19 의료진 대상 무료 이벤트부터 치매 노인의 팔목에 보호자 연락처를 새기는 무료 시술까지, 이조차 평범하지 않다.

이제는 타투(문신)가 생활이 됐다는 의사 조명신, 휴일 없이 일하면서도 인생이 즐거운 비결을 그에게 물었다. 첫 질문은 병원 이름 치고 특이한 빈센트였다.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빈센트를 대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꿈은 '인디아나 존스', 현실은 의대

그의 인생은 마치 ‘가보지 않은 길’을 지워가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그가 오른손에는 메스를, 왼손엔 타투 머신을 들고 바라보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병원 이름이 ‘빈센트’인데, 설마 빈센트 반 고흐의 빈센트인가요?

“맞아요. 제가 존경하는 화가거든요. 그의 그림이 아니라 고흐의 삶을 늘 그리워해요.”

-존경하고, 그립다고요?

“네, 어렵게 살았지만, 고흐는 평생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했잖아요.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저도 그런 열정을 실행에 옮기는 멋진 삶을 살다 가는 게 로망이에요.”

-어릴 때 꿈은 고고학자였지요.

“맞아요. 이렇게 흰 가운 입고 살리라고는 생각 못 했죠.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본 이후, 그렇게 사는 게 꿈이었거든요. 세계 곳곳을 모험하면서도 학구적인 직업이 고고학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의대에 진학했나요.

“가정형편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학력고사(수능 이전의 대입시험) 점수가 평소보다 높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돈 걱정 하지 않고 살려면 어느 학과를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택했죠.”

-시험을 아주 잘 봤나 봐요.

“점수가 꽤 잘 나왔어요. 대학도 장학생(중앙대 승당장학생)으로 입학했어요. 3학년까지 (학점 조건 없이) 등록금 면제에, 월 15만원씩 생활비도 지원받았죠.”

-의대에 들어가서는 어땠나요.

“방황을 많이 했죠. 한 달에 한 번 학교에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한 번은 왜 나갔어요?

“생활비를 받으려면 직접 가야 했거든요. 하하.”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랬나요.

“내 길이 아닌 것 같았죠. 입학한 동기도 불순하잖아요. 열여덟 살짜리가 돈 잘 버는 직업이 뭘까 생각해서 선택한 전공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내 자신이 실망스러웠죠.”

-그 방황이 언제까지 계속됐나요.

“예과 2학년까지요. 동기들 다 모아놓고 나 그만둔다고 선언도 했어요. 실제 미국으로 가려고 어플라이(지원)해서 어드미션(입학 허가)도 받았고요.”

-그런데 졸업을 했네요.

“네, 당시 지도교수님이 제 얘기를 듣고 조언하시길 ‘미국은 의대 들어가기가 더 힘들고, 들어가도 우리보다 과정이 더 길다. 어차피 2년 다닌 거 한국에서 의사 면허 따서 미국 가서 살아’ 하시는 거예요. 그 얘길 들으니 장학금 수령 기간도 남았고, 비록 학점은 저공행진이었지만 다닌 세월이 있으니 그게 낫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학교 마치면 바로 미국으로 가자’ 싶었죠.”

◇공보의 시절엔 남극으로

그는 휴일 없이 일한다고 한다. 인터뷰 전날인 어린이날에도 12건의 타투 시술을 했다. 한진탁 인턴기자

그는 군 생활도 별나게 했다. 공중보건의로 무의촌에서 진료를 하며 보내던 그의 눈을 공문 하나가 번쩍 뜨이게 했다. 보건복지부에서 날아온 남극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 모집 공고였다. 월동대원 중엔 의료분야도 있다.

-당시 선발되려고 장관에게 편지까지 썼다고요.

“맞아요. 어떻게든 해외에 나가보고 싶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이었으니까. 8명이 지원을 했다는데, 제가 그들보다 더 잘난 건 아닐 텐데 꼭 선발돼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결정권자에게 세종기지에 가고 싶은 열렬한 마음을 전하자 싶었죠. 그래서 저를 뽑아야 하는 7가지 이유를 적어서 복지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저는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스타일이거든요.”

-장관에게 답장이 왔나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장관이 보지는 않았고 담당 과장이 받아봤더라고요. 그분이 오대규 전 질병관리본부장이에요.”

-편지 덕분에 선발이 됐을까요?

“하하. 당시 오대규 과장께서 편지를 보고 ‘당신이 보낸 게 맞냐’고 연락을 하셨더군요. 선발 실무를 맡는 극지연구소로 편지도 전달해주셨고요. 제 생각엔 선발된 결정적 이유가 편지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파견된 남극에서는 좋았나요.

“선발됐을 땐 정말 좋았어요. 의대 진학으로 잠시 포기한 ‘인디아나 존스’ 같은 삶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죠. 그런데 실제 남극에서는 힘들었어요.”

-생활이 어땠나요.

“1년 동안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생활이니 지루해요. 오존층이 얇기 때문에 해가 있을 때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요. 그나마 낚시를 한다거나, 펭귄마을에 간다거나, 물개랑 논다거나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죠.”

-기지 생활은요.

“저는 의사로 간 거잖아요. 그런데 저까지 하역 같은 작업에 동원을 하더라고요. 물론 파견 때 계약엔 그런 사항은 없었는데, 그곳 문화가 그랬던 거죠. 그런데 의료진은 다른 대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진료를 해야 하니 일반 작업에 동원돼선 안 되거든요. 작업을 하다 혹시라도 다치면 더 큰일이고요. 의사는 저 하나였거든요.“

◇장관한테 두 번 편지 쓴 사연

그의 병원 진료실은 의사이자 타투이스트, 아마추어 화가 조명신을 상징하는 물건과 작품이 혼재돼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또 장관한테 편지를 썼어요. ‘부당하다, 시정이 안 된다면 나를 다시 내보내달라’고. 복지부에서 답을 주기를 ‘정 원하면 빼주겠다’고 하더군요.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니까 복지부도 곤혹스러웠겠죠. 그때 세종기지에 오셨던 ‘새 박사’ 윤무부 교수님이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어떻게요.

“윤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불합리하고 힘들다는 걸 알겠다.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게 좋지 않겠냐. 지금 집에 돌아가면 평생 후회를 할 수도 있다. 세종기지에서 보낸 1년이 당신 인생에 중요한 획을 그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내 고충에 교감해주는 분의 말씀이라서 수긍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버텼나요.

“어떻게든 여기서 1년을 버티자고 마음먹었어요. 만약 내가 작업에 동원돼야 한다면 하역 같은 몸 쓰는 일이 아니라 주방 보조를 하겠다고 했죠. 몸 쓰는 작업을 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다른 대원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마침 주방장도 한 명뿐이라 손이 모자라기도 했고요.”

◇흉터 제거 수술하며 들여다본 것

그는 “노력에 비해 되레 많은 걸 받는 삶”이라고 말했다. 의사뿐 아니라 타투이스트로서 느끼는 보람과 재미 역시 큰 덕분이다. 그에게 실제 타투를 할 때 모습을 부탁했다. 한진탁 인턴기자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선 의사로서 어떤 길을 갈지도 택해야 했을 텐데요.

“제가 레지던트는 진단방사선과를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전문의 취득을 포기했어요. 대신 선배 의사의 성형외과 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배웠죠. 순천향대에서 과장까지 하고 개원을 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재미있기도 하고 또 제가 잘하기도 하더라고요. 그 병원에서 이미 쌍꺼풀 수술을 700건 정도 했죠.”

그는 “참고로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가 성형수술을 하는 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때까진 몰랐던 적성을 발견한 건가요.

“그랬어요. 사실 군대에서 함께 내무반 생활했던 분이 소개시켜준 분이었고 ‘혹시 모르니 이것도 배워 놔라’ 해서 배운 건데 평생을 하게 될 줄은 몰랐죠.”

그런 연유로 성형수술이 가능한 일반의로서 경기 안양시에 병원을 연 게 1997년이다.

-그럼 미용 성형수술을 주로 했겠군요.

“그렇죠. 쌍꺼풀과 코 수술만 했어요. 그 이외에는 상처 제거 수술이었죠. 그때 상처에 관심이 생긴 거예요. 상처 제거 수술이 흥미로웠거든요.”

-왜요?

“처음에는 ‘왜 이렇게 상처에 신경을 쓰지’ 했거든요. 얼굴에 난 작은 상처, 예를 들면 할퀸 자국 같은 건 화장으로 커버하면 되지 않나 싶은데 당사자한테는 엄청 심각한 일인 거예요. 그런 흉터도 제거 수술을 하고 나면 환자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눈이나 코 수술은 좀 정형화돼 있거든요. 그런데 상처는 생길 때 사연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설명할 수가 없죠.”

-예를 들면요.

“교통사고로 난 상처가 있다고 쳐요. 그런데 그 사고가 났을 때 가족을 함께 잃었다면, 그 흉터를 볼 때마다 먼저 떠나 보낸 가족 또 그 이후 힘들어진 삶이 생각나겠죠. 어떻게 보면 영원한 기억장치가 되는 거예요.”

◇문신 지우려 자세히 보다가 ‘풍덩’

그가 20여 년 전 처음 산 타투 머신이다. 타투 머신 제조사로 유명한 영국 미키샤프(Micky Sharpz)사의 제품이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아직 간직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문신 시술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제거 수술을 하더라도 어떤 상처는 수술 자국이 남거든요. 이걸 좀 더 말끔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피부색과 같은 색으로 문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배우게 된 건가요.

“그건 ‘장미’ 문신을 지우러 온 환자가 계기였어요.”

그가 지난달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밝힌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아, ‘왜 이렇게 잘된 문신을 지우려고 할까’ 의아했다고 한 그 문신요?

“네, 문신을 제거하려면 문신을 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문신은 그때까지 제가 문신 제거 시술을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예술적이었거든요. 당시는 색을 입힌 컬러 문신이 많지 않을 때였는데 색도 예뻤고요. ‘왜 이걸 지우려고 할까. 아깝다’ 싶었죠.”

-왜 지우려고 한 거였나요.

“처음엔 묻지 못하고 나중에 물어봤더니 그 문신은 자신이 칼로 자해한 흔적을 안 보이게 하려고 한 거였더라고요. 그런데 문신에 대한 선입견이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문신’하면 ‘조폭’, ‘장미 문신’하면 ‘장미파’하던 시절이라. 거기다 아들이 ‘아빠, 이 문신은 언제 한 거야’ ‘왜 한 거야’라고 묻는데 사실대로 말해줄 수도 없어 난처하기도 했고요. 아빠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숨이 차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문신을 지우며, 문신의 미를 발견한 거다. 나태주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노래했는데, 그가 그랬다. 그 장미 문신을 지워가며 ‘문신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문신을 한 타투이스트 ‘키미’를 찾아갔다.

-언제부터 병원에서 문신 시술을 한 건가요?

“키미 선생님을 찾아간 게 1999년인데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전까지는 상업적으로 한 건 아니에요. 실력이 좋지 않을 때라서 돈은 받지 않고 했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소문이 났어요.”

-문신도 기술뿐 아니라 예술적 소양까지 두루 키워야 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우연찮은 기회에 한 단체에서 타투이스트 김건원씨를 알게 됐거든요. 그 분의 타투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원래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배우고 싶다고 연락을 해서 데생부터 배웠죠.”

-미술까지 하게 된 거군요.

“해야 해요. 처음에는 문신을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할수록 그렇지가 않아요. 또 그림만 잘 그린다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도화지 같은 종이와 피부는 다르니까.”

◇매번 달라서 매번 흥분된다

그가 시술한 타투들. 왼쪽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한 사람의 양 팔뚝에 새긴 것으로 고객의 요구대로 본인의 외면과 내면을 나무와 뿌리로 표현했다. 세 번째 타투는 제우스 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네 번째는 젊은 셰프에게 시술한 칼 모양 타투. “녹슨 나이프처럼 나이 들어도 셰프로 남고 싶다”는 고객의 바람이 담겼다. 녹슨 칼의 질감이 잘 살았다. 조명신 제공


-하면 할수록 타투의 매력도 달리 느껴질 것 같아요.

“같은 도안, 같은 타투 머신, 같은 잉크로 해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와요. 피부 두께나 톤, 부위가 다르니까. 그러니 매번 새로워요. 그래서 애착이 많아요. 타투를 할 때마다 지문처럼 내 정체성이 붙어 나가는 기분이랄까요. 성형수술과 타투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하겠냐는 질문도 종종 받거든요. 저는 타투를 할 거 같아요. 왜? 늘 새로우니까 늘 흥분되거든요.”

-성형수술도 분명 보람이 있겠죠.

“그럼요. 고객이 주는 (감정적인) 보상, 금전적인 이익이 있죠.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또 20년 넘게 성형수술을 한 게 타투의 또 다른 바탕이 되기도 했고요.”

-타투를 해서 삶이 달라진 게 있다면요.

“음, 만약 성형수술만 계속했다면 진작 의사는 그만두고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삶에 더 가까이 가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더 빨리 많은 돈을 벌었을 테니까 ‘이제 됐다’ 하고선 얼른 접고 원래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했겠죠. 그런데 타투를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게 된 거예요. 문화인류학 고고미술학 전공 박사 수료 상태인데 박사 과정 들어간 게 쉰 살 때거든요.”

-일반 진료와 타투 시술의 비중이 어떻게 되나요.

“처음에는 성형수술이 80%였는데, 지금은 타투가 80%로 역전됐어요. 어제(어린이날)도 12건을 했어요.”

-휴일이었는데요.

“저는 휴일 없이 일해요. 상담도 원하는 시간에 카카오톡으로 거의 모든 시간에 가능하죠.”

-그 정도면 워커홀릭 아닌가요.

“그러면 어때요. 제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고, 하고 나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듣고, 또 어떤 분은 선물도 주시는데. 이런 직업이 어디 있나요.”

-수입은 줄었겠네요.

“시간당 수익으로 따지면 그렇죠. 하지만, 먹고는 살아요. 하하.”

-타투도 종류가 많은데 다 하시는 건가요.

“눈썹 문신 같은 반영구 화장, 백반증이나 탈모 부위에 하는 메디컬 타투, 패션 타투 다 해요.”

◇문신을 의사한테만 받나요

타투를 둘러싸고는 해묵은 논쟁이 있다. 벌써 십수 년째.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 시술을 하면 불법이라서다. 지난 1992년 대법원이 문신 시술은 의료 행위라고 판단한 판례 때문이다. 패션 타투뿐 아니라 반영구 화장 시술을 받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그 모든 문신을 의사에게서 받지는 않는다.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때문에 비의료인도 문신 시술을 할 수 있도록 문신사 자격 제도를 도입하자는 ‘문신사법’이 단골로 발의되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번번이 폐기돼 왔다. 21대 국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법안을 여야 의원들이 제출했다.

-문신 양성화에도 찬성하시죠.

“현실을 제대로 보자는 거죠. 만약 의사만 문신을 할 수 있게 한다면, 의사 중 과연 몇 명이나 할 준비가 돼 있는지, 또 그 수가 문신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지 말이에요. 이미 수만 명의 타투이스트가 활동하고 있는데. 합법화해야 전문성을 키울 수 있고, 그들에게 직업윤리도 요구할 수 있죠. 음성적으로 이뤄지면 행정력으로 관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실제 엉터리 시술로 피해 보는 이들이 있고요. 뭐가 국민 건강에 더 도움이 되겠어요.”

-대한의사협회에서는 반대하던데요.

“십수 년째 같은 입장이죠. 국회도 의협 때문에 문신사법을 제대로 심의하지 못하는 걸 거예요. 그러니 국민 건강과 관련한 문제가 계속 방치되고 있는 거죠.”

-의협은 왜 반대하는 걸까요.

“문신사 자격을 열어주면 다른 준의료 행위에도 여파가 있으리라고 우려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물리치료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같은 이들도 단독으로 개원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으니까요.”

-문신사법이 제정되더라도 대다수 의사들에게는 악영향이 없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현장 의사들은 많이들 원할 걸요. 문신사법이 만들어지면, 병원에 문신사를 고용해서 분야를 확대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런데도 논의에 진전이 없으니 답답하죠.”

◇나는 상처를 누르는 사람

그가 자신이 지웠거나 시술한 타투 사진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타투 시술도 준비가 필요하겠죠?

“가장 큰 준비는 고객이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거죠. 그래서 상담이 중요해요. 의외로 고객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부분 ‘요즘 타투가 트렌드라 하고 싶어서 왔어요’ ‘요즘 어떤 디자인을 많이 해요’ ‘뭐가 좋을지 추천해주세요’ 하죠.”

-상담에도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은데요.

“오! 아니에요. 다행히 요즘은 카톡이라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있잖아요. 저는 거의 24시간 상담하거든요. 그래서 방문 전에 카톡으로 고객이 어디에 시술하고 싶은지, 왜 하고 싶은지 간단히 말해주면 직관적으로 이미지가 떠올라요. 많이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상처를 가리고 싶어 타투를 원하는 경우도 그런가요.

“마찬가지예요. 요구는 비슷하거든요. 다만 피부색으로 티가 나지 않게 가리느냐, 그 위에 그림으로 가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상처에 얽힌 사연도 듣게 될 거 같은데요.

“그런 사연은 미리 보내주는데, 제가 꼬치꼬치 깊게 묻진 않아요. 화상이냐, 칼 자국이냐 그 이후에 어떤 조치를 했느냐 같은 기본 히스토리만 알면 되거든요. 예를 들어 레이저 치료를 한 적이 있다면 피부 상태에 영향이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타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예요. 처음에는 저도 경험이 부족해서 상처에 관해서 터놓고 얘기하다가 내담자들이 울컥해서 눈물을 쏟는 일도 많았죠. 그런데 하다 보니 굳이 그렇게 울도록 만들 필요가 없더라고요. 저는 상처를 환기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눌러주는 사람이거든요.”

-상처에 관해서 어쨌든 계속 보고 생각을 하게 되겠네요.

“맞아요. 제가 느낀 건 상처는 그냥 상처일 뿐이라는 거죠. 흔히 우리가 소방관의 화상을 두고 ‘영광의 상처’ ‘훈장’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당사자에겐 아니에요. 그저 상처죠. 상처를 볼 때마다 다시 깨끗한 피부로 돌아가고 싶죠. ‘그때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상처 입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면서요. 다른 사람이 상처를 보면서 갖는 이미지와 당사자의 생각은 달라요. 지금까지 상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물론 그러니까 저를 찾아온 거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이래요. 상처는 상처다, 그러니 그걸 굳이 남이 캐물어 들출 필요가 없다, 본인이 먼저 말하기 전까진 못 본 척할 줄 알아야 한다.”

-소방관들에게 무료 시술 이벤트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시죠. 그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게 됐나요.

“제가 2002년 기차로 미국 횡단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9ㆍ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였죠. 기차에서 한 백인 여성을 만났는데, 팔에 이름이 잔뜩 새겨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9ㆍ11 테러 때 목숨을 잃은 소방관들의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조심스럽게 그렇게 문신으로 새기기까지 한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은 우리의 영웅 아니냐, 그러니까 기억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2019년 명동에 병원을 열면서 이른바 ‘영웅시리즈’를 시작했고 그 첫 대상으로 소방공무원들의 신청을 받아 무료 타투 이벤트를 했죠.”

-치매 노인들의 팔목에 보호자 연락처를 무료로 새기는 시술도 계속하고 계시죠.

“네, 다 다급한 처지에서 연락하고 오시는 분들이고 시술도 간단해서 언제든 오시라고 하죠.”

◇오늘이 좋아야 내일도 좋아요

순간의 열정과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 삶, 그가 인생을 사는 방식이다. 한진탁 인턴기자


-타투가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초기에는 어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죠. 지우러 온 분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다가 타투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나중엔 메디컬로서 의미도 있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타투가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구나 생각해요. 그렇게 의미가 확장되어 왔죠.”

-지금 나에게 타투란.

“생활이에요. (미소) 눈 떠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타투로 하루를 보내죠. 제가 쌍꺼풀 수술 잘한다고 사람들 입에 그렇게 오르내리고 방송에 나가지는 못할 거 아니에요. 하하.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도 타투 덕분이죠. 그러니까 지금의 저는 타투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죠. 타투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살아온 듯해요.

“우리는 시간이라는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과 같은 존재니까요. 저는 그래서 시간이 제일 무서워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누구나 잘 활용하며 사는 건 아니잖아요. ‘더 나이 들어 못 하기 전에 어서 하자’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앞으로 또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아내에겐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있어요! 남태평양에 과달카날이라는 섬이 있어요. 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일본이 격전을 벌인 곳이죠. 그 섬으로 가서 관광객을 상대로 날씨가 좋을 때는 경비행기 투어를 해주고, 날이 궂을 땐 타투를 하며 살고 싶어요. 나중에 그 섬에 타투 하는 한국인이 있다더라 하면 저인 줄 아세요. 하하.”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뭔가요.

“자기 인생을 살아라.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듯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남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 인생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자기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왜?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아요!”

그에게선 내내 신이 느껴졌다. 실제 그는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면 내일은 좋을 거라고 하잖아요. 전 그런 내일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오늘이 좋아야 내일도 좋아요. 내일이 어디서 뚝 떨어지나요?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되는 거죠.” 시간이라는 기회의 평등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그의 이름 석 자로 이런 삼행시를 지어볼까. 연이 아닌 주연, 당신입니다. 심하고 명심해야 할 진리죠. 나는 인생 드라마, 당신이 만드는 찰나에 달려 있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 사람, 조명신이 새삼 일깨운다.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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