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연구개발(R&D) 업무만 담당해왔던 회사원이 행정총괄 직책을 맡은 뒤 업무 부담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사망했다면 근로시간에 관계없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부장 이종환)는 A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장의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1996년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 입사해 22년간 연구개발 업무를 해왔던 A씨는 2018년부터 대외협력, 대(對)국회업무, 인사·총무·복지 등 각종 행정업무 전반을 맡게 됐다.
A씨는 새로운 직책을 맡은 지 10개월이 지난 2019년 4월 주말 오전, 회사 근처 산길로 운동을 하러 갔다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인근 병원에 옮겨졌지만 이틀 만에 만 52세 나이로 숨졌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유족은 A씨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봐야한다며 유족급여 등을 청구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씨에게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킬 정도의 업무 부담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특히 A씨의 절대적인 근로시간에 비춰봤을 때 ‘과로’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폈다. A씨는 사망 직전 3달간은 주당 41시간 22분, 1달간은 주당 46시간 56분,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44시간 11분을 근무했다. 이에 비해 산재 판단을 위한 고용노동부 고시에서는 ‘발병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60시간을 넘을 때 업무와 질병 간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A씨 근로시간이 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노동부 고시는 구체적인 기준을 해석·적용하는 데 고려할 사항을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고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A씨는 (행정직 보임 이후) 생소하고 방대한 범위 업무를 일상적으로 처리하며 정신적 피로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당시 A씨의 업무 강도에 주목했다. 기본적인 업무 외에도 조직 재구조화 업무, 제품 수출로 받은 기술료를 소속 연구원들에게 배분하는 업무 등 ‘조직원들의 불만·갈등이 빚어질 만한 일’을 맡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기술료 배분은 연구개발자 수백명에게 성과를 나눠주는 것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어 A씨가 일부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며 “스트레스를 겪으며 과중한 업무를 한 게 심근경색 발병에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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