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이슈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 지키려는 자, 바꾸려는 자의 대결 구도부터 닮았다. 문제는 각자가 취사선택한 ‘과학’을 진실의 근거로 들이밀 때다. 지구를 건강하게 가꿔 나가자는 데 동의하면서도 진단부터 다르게 내놓으니 해법은 극단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 주 나온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아온 환경주의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도발적인 책이다. 지금껏 우린 인간의 과한 욕심 탓에 지구를 망쳤다고 자책했는데, 책은 정반대로 ‘결핍’을 문제 삼으며 더 많은 성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환경주의자들이 들으면 대경실색할 이야기들. 그래서 반격을 담은 책 ‘인간의 종말’도 가져왔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 문제를 경제 문제로 전환하자는 게 핵심이다.
"기후 양치기에 속지 말라" 원전 수호자의 분노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의 저자 마이클 셸런버거는 강경파 환경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변절자’다. 30년간 환경운동에 몸을 담아 왔지만, 원전 수호자로 세계를 누비고 있으니 말이다. 2017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보수 진영 인사들의 환경 교사로도 맹활약한 바 있다.
그는 기후위기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고 스스로 말한다. 다만 그 심각성이 현실에 비해 너무 과장됐다는 게 그의 문제 의식이다. 주 공격 대상은 ‘과격한’ 환경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지구 멸망’ ‘인류 대멸종’ 등 종말론적 서사로 공포 마케팅을 부추기며 환경운동을 망치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근거로 내세운 건 북극곰과 아마존이다. 환경주의자들은 북극곰의 개체수가, 아마존의 열대 우림이 줄어드는 건 기후변화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보기엔 아니다. 북극곰은 인간의 사냥 때문에 줄었고, 아마존의 숲은 가난한 주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나무를 벌목하고 숲을 개간하면서 벌어진 일이란 설명이다.
신재생 에너지에 대해서도 “자연을 파괴하는 낭비 에너지”라고 일축한다. 에너지 밀도와 효율이 너무 낮다는 점에서다. 태양광은 너무 비싸고, 풍력 발전은 야생 조류 생태계를 파괴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런데도 선진국들은 기후 위기에 동참하라며 개발도상국들에게 신재생 에너지를 강요하며 지속가능한 개발을 종용한다. 선진국들은 석탄 화력 발전으로 속도감 있게 경제 발전을 달성해놓고 말이다. 그는 이를 두고 “비윤리적인 위선”이자 “환경 식민주의의 민낯”이라 꼬집는다.
그가 믿는 건 성장과 기술이다. 개도국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때 산림 파괴도 줄고 생태계 서식지도 확보할 수 있다는 거다. “경제 발전이 자연 보호”란 통념에 반하는 구호도 내세운다. 이를 도모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생산성 높고 친환경 탄소 중립을 갖춘” 원자력 발전을 제안하는 게 결론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믿어온 환경 상식의 균열을 내는 솔깃한 주장에도, 동원된 논리가 다소 단편적이고 단순하게 다가와서다. 바다거북을 멸종에서 구한 건 플라스틱 기술이라는 전개는 논점을 흐리고, 방사능 폐기물 위험성 등을 제로라고 일축하는 건 한쪽의 주장만 옮겨 놓아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신흥 종교냐는 비아냥까지 듣는 환경주의자들의 맹목성, 신재생에너지 기업과의 결탁 관계 등을 폭로하며 환경운동이 자기 과신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경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보호 대상은 자연 아닌 인간" 현실주의 환경론자들의 일침
기후위기는 아직은 피할 수 있고, 천천히 심화될 것이고, 그리 혹독하지 않을 것이니 지금 먹고 사는 데 더 집중하자는 셸런버거의 주장은 ‘인간의 종말’이란 책을 통해 단박에 무너진다. 독일의 과학저널리스트 2명은 책에서 기후위기가 우리의 통념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주장들에 대해 현재를 위해 미래에 치러야 할 비용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일갈한다. “쇼핑광이 신용카드로 온갖 물건을 구매해놓고 희희낙락하는 상황”(232쪽)이란 지적이다.
책의 미덕은 환경문제를 선악으로 끌고 가지 않는 데 있다. 매우 현실적이다. 이들은 굶주림에 지친 북극곰을 위해 환경 보호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대량 절멸이 일어나더라도 언젠가는 회복 가능하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라지면 끝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보호해야 하는 쪽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 우리 자신”이라고 강조한다.
지구가 인간을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셸런버거는 ‘충격요법’이라 평가절하했지만, 사람들은 그럼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 저자들도 안다. 과학적 사실과 당위로서 호소해봐야 '소 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해법은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거다. 이들은 시장이라는 괴물을 돈으로 길들이자고 제안한다. 가령 환경 관련 규제를 등한시하는 국가가 생산한 제품에 ‘생태 관세’를 부과하는 식이다. 녹색사업은 이익이 많이 나고, 자연 파괴는 밑지는 사업이 되도록 만들어 ‘생태자본주의’의 물꼬를 트자는 것. 이를 위해 과학과 권력이 서로 대화할 시점이란 제언도 와 닿는다.
환경운동에 현실주의를 접목하려는 고민을 녹여낸 두 책 모두 낙관주의에 기반한다. 물론 그 뉘앙스는 천지 차이지만. ‘아직은 괜찮다’는 다독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다그침. 당신의 머리와 마음은 어디로 더 기울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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