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윤여정·드라마 '나빌레라' 박인환?
"새비지 그랜마"?
"공정사회 금 낸 기성세대 혼내는 어른"
'새 어른'의 등장... MZ세대 열광
요즘 대중문화를 뜨겁게 달구는 두 노 배우가 있다. 윤여정(74)과 박인환(76).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은 '휴먼여정체'(윤여정 특유의 '쿨'한 말투)로 20~40대의 입에 연일 오르내리고, 박인환은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70대에 발레에 도전한 덕출을 연기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들은 윤여정에 웃고, 박인환에 운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강요하지 않으며 의무를 다하려는, 새 '어른'의 등장에 대한 열광이 배경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동료 같은 70대 배우"의 팩폭
'새비지 그랜마(Savage grandma)!'
의역하면 '팩폭(팩트폭력) 쩌는 할머니'쯤 되겠다. 영국 아카데미영화(BAFTA)상 유튜브 채널에 최근 올라온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 동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아시아 노배우가 "고상한 체한다(Snobbish)고 알려진 영국인들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하자, 외국인들도 깜짝 놀란 것이다.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윤여정은 '아시아 배우에게 상을 줘 고맙다'식의 서구사회에 대한 상찬을 늘어놓지 않았다.
여든을 바라보는 배우의 말엔 집단주의적 사고방식도 읽히지 않는다. "서구사회에 단순히 '인정해줘 고맙다'고만 하지 않는 주체성, 그리고 한국 배우 윤여정이 아닌 배우 윤여정으로 평가받길 바라는 개인주의적 시선에 MZ세대는 관심을 보인다"(문화평론가 성상민).
윤여정은 또래 노배우처럼 포용과 따뜻함, 윤리적 모습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의 말은 ①냉소적이며 ②격의 없이 솔직하고 ③탈권위적인 게 특징이다.
윤여정의 언어는 '젊다'. "아니 대신 내줄 것도 아닌데 도와주긴 뭘 도와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소영(윤여정)은 "계산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가게 종업원의 말에 이렇게 혼잣말한다. "윤여정은 평소 냉소적인 농담을 즐기고, 그 유머 코드와 대사가 잘 맞아떨어져"(이재용 감독) 관객들 사이에 회자된다.
"내가 연기를 제일 못했어."(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제작보고회) 윤여정은 스스로 권위를 허물어, 할 말은 당당하게 하면서도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자식보다 연배가 낮은 젊은 세대에 윤여정은 "세대를 초월하는 쿨한"(tvN '윤스테이' 김세희 PD) 배우이자, "모든 말에 유머가 한 스푼 담겨 늘 주위 사람의 감탄사나 의성어를 유발하는 어른"(방송인 박경림)으로 통한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 선생님이 '나도 예순여섯 살은 처음이야'라고 했는데, 작업하며 선생님도 나처럼 하루하루 새롭게 닥치는 일을 조심스럽게 해결해가는 동료란 생각을 들게 한 어른"(김대주 작가)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70대 4차원 배우"라 불린 윤여정은 온라인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 광고에서 "옷 많이 산다고 뭐라 그러는 애들 있더라, 참 나 웃겨 정말"이라며 "남 눈치보며 살지 마"라고 혀를 찼다. MZ세대는 윤여정을 통해 욕망한다. "화려한 대중문화에서 '아싸'(아웃사이더)였던 70대 배우가 '내 역할은 하겠다'며 꾸밈없이 나서고, 그렇게 인정받는 모습에 취업으로 쪼그라든 20~30대가 대리만족"(곽금주 서울대 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해" 우황청심환 먹으며 버틴 노배우의 위로
"응원은 못 해줄망정 밟지는 말아야지!"
'나빌레라'에서 덕출(박인환)은 인턴인 손녀에게 '갑질'을 한 상사에게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호통을 친다. 덕출은 공정한 사회를 만들지 못해 그림자 같은 존재로 전락한 '어른'을 대신해 머리를 숙인다. "요즘 애들한테 해 줄 말이 없어, 미안해서.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박인환은 지친 청춘들에 조용히 쉴 자리를 내주고, 응원을 보낸다. 덕출은 콩쿠르를 앞두고 바짝 긴장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채록(송강)을 불러 밥을 먹인 뒤 잠을 재우고 취업에 실패한 손녀 은호(홍승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할애비에게 넌 별"이라며 라디오 방송에 문자를 보내 격려한다. "덕출은 혈연을 넘어 또 다른 유대로 가족의 의미를 넓히고 세대 간 소통을 실천하며, 술 주정 같은 요란한 훈계를 하지 않는다."(작가 박생강)
잘못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기성세대에 등을 돌린 젊은 시청자들은 결국 '덕며들기'(덕출에 스며들다) 시작했다. 불신으로 팽팽히 맞선 노인과 젊은이, 용서를 구하며 먼저 손을 내민 보기 드문 어른의 등장에 '나를 돌아봤다' '울면서 봤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취업난에 살기도 어려운데, 이해받고 위안받기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늘 혼나기만 하던 젊은이들이 채록이처럼 마음을 연 게 아닐까 싶어요." 19일 서울 강남 카페에서 만난 박인환의 말이다.
박인환은 이순재·신구·백일섭처럼 자상하거나 친숙한 이미지의 노배우는 아니었다. 그런 박인환은 '나빌레라'에서 무용원 휴학생 채록에게 발레를 배운다. 처자식을 돌보기 위해 접었던 무용수의 꿈을 다시 펼치기 위해서다.
처음엔 "이 나이에 해낼 수 있을까"란 걱정에 출연을 망설였다. 욕심을 낸 박인환은 지난해 여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 6개월을 서울 강남의 한 발레 연습실에서 땀을 흘렸다. 박인환은 "바에 다리를 올려 놓으니 쥐가 나고 안 쓰던 근육을 쓰니 몸이 저리고 시큰시큰하더라"며 "밸런스 잡기 연습을 하면서 끙끙 앓았다"며 웃었다.
박인환도 젊은 시절엔 채록처럼 '아픈 청춘'이었다. 1965년 드라마 '긴 귀항 항로'로 데뷔한 박인환은 한때 "우황청심환을 먹으며" 연기했다. 워낙 소심한 탓이다. 그런 그는 "살아남으려면 개성을 만들자"는 생각에 '버스 승객 A' 역을 맡으면서도 '어떤 캐릭터를 만들까'를 고민했다. 1980년 '전원일기' 이후 41년 동안 한 해도 안 쉬고 작품을 이어온 비결이다.
극중 덕철의 수첩 맨 앞장엔 '나는 알츠하이머다'란 문구가 적혀 있다. 박인환은 "75세가 넘으면 3년 마다 운전면허 갱신을 해야 하는데 그 때 치매 테스트를 받는다"며 "드라마에서처럼 '이게 뭐죠?'라고 묻는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막상 치매 걸린 역을 연기하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잖아요. 노인의 삶을 다룬 얘기도 세대 간 소통을 다루는 작품도 많아져야 해요. 시대의 거울이 드라마이고,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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