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과 산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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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과 산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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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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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조은아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산책을 나설 때마다 교향곡을 하나씩 챙기곤 한다. 차 소리 같은 문명의 소음에서 충분히 멀어져 공원의 깊숙한 곳까지 이르면 또 다른 문명의 장치를 꺼내 귀에 꽂는다. 이어폰을 통해 듣는 음악은 산책의 동선에 맞춰 대개 4악장짜리 교향곡을 선택한다. 발걸음 따라 굽이굽이 기승전결의 유장한 서사가 스며들 동네 공원은 마침 백제시대 토성을 품고 있다. 그 능선을 따라 오르막 내리막 걷다 보면 음악의 굴곡과 어울려 상승과 하강의 느낌을 서로 북돋아 줄 때가 많다. 내딛는 걸음은 음악의 박동인 리듬과도 맞물린다.

요 며칠은 브루크너 교향곡과 함께 걸었다. 숲 속을 거닐며 음악적 영감을 떠올렸던 브루크너의 음악은 당연하게도 자연을 닮았다. 새벽의 붉은 하늘, 안개가 자욱한 대기, 숲의 청량한 기운, 산꼭대기 탁 트인 바람, 한낮의 느닷없는 소나기가 음악적 중요 장면과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브루크너를 비롯해 수많은 작곡가들은 음표를 통해 자연의 영혼을 번역해 왔다. 신이 부여해 미리 주어진, 그래서 영원한 자연의 법칙을 음악을 통해 해독하려 했다. 시인이 사전에서 어휘를 찾듯 음의 재료를 자연 안에서 탐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풍광을 단순히 흉내 내거나 회화적 묘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신 자연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그 목소리를 공명시키려 노력해 왔다. 예쁜 꽃을 꺾어 식물도감에 박제하기보다는 꽃들이 음악으로 살아 숨 쉴 수 있는 청각적 구현을 추구했다.

교향곡을 들으며 푹신한 흙길을 걷다 보면 땅속에 뿌리를 둔 건강한 생각들이 덩달아 발아되는 느낌이 든다. 콘크리트에 갇힌 숨 가쁜 일상 속에서 곤죽이 되었던 마음은 신선한 생기를 얻고, 복잡하게 엉킨 불안들 혹은 죄다 부질없다 여겼던 헛헛함도 자연스레 진정되곤 한다. 그뿐인가. 산책의 발걸음은 시선도 맑게 틔워 준다. 음악의 굴곡에 따라 눈길의 높낮이가 달라지니 신기하다. 낮은 음역의 첼로와 트럼본이 묵직한 음색으로 악상의 중력을 끌어내리면 나무 밑동의 짙은 그늘을 향해 눈길이 머문다. 반면, 바이올린과 플루트 같은 고음역의 군단이 가파른 사선을 그리며 드높게 비상하면 시선은 자연스레 창공으로 치솟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작곡가들이 교향곡 완서악장의 템포로 빈번히 선택하는 안단테(Andante)는 본디 편안한 걸음을 염두에 둔 속도였다. 하지만 현대의 일상에선 발걸음을 안단테에 맞추는 것이 자못 부자연스럽다. 산책을 위한 공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파워워킹으로 활보하는 사람들 곁에서 브루크너의 안단테 속력을 고수하자니 어색하고 민망해진다. 그러므로 느린 악장에선 되도록 인적이 드문 숲길을 택해 걷는다. 4분음표마다 한 걸음씩 차근히 내딛으며 옛 시대 걸음의 속도를 되살려 본다. 그렇게 안단테 템포에 걸음을 맞추며 현 시대 사람들이 갖지 못한 명상과 여백을 새삼 배우고 깨닫는다.

시간을 따라 휘발하는 음악의 흐름은 산책 중 맞닥뜨리는 공간의 이정표와 결합하며 기억 속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다. 순간에 스치는 악상을 언덕 위 나무나 그 곁의 바위에게 연결하다 보면 귀와 눈을 자극하는 공감각적 기억이 새롭게 각인된다. 제시부에 등장했던 제1주제를 재현부에서 다시 조우하는 음악적 동선은 외딴 곳으로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발걸음과도 잇닿아 있다. 작품 전체의 구조를 굽이굽이 탐색하는 공감각적 발걸음은 교향곡과 산책에 신선한 의미를 부여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리가 움직여야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던, 그러니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산책하라던, 그리하면 걸을 때마다 천사들이 속삭여 줄 거라던 그의 격언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산책과 함께할 교향곡을 선곡하는 것도 크나큰 기쁨이다. 관악과 현악의 서로 다른 음색의 결을 사방에서 교차하는 산들바람의 방향에 빗대어 본다.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인 명상을 꾸준히 찾아가고 싶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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