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기 힘든 국민들...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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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기 힘든 국민들...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다

입력
2021.04.17 15:00
수정
2021.04.1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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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우크라이나 키예프

두 번의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우크라이나 키예프 독립 광장. 이동학 작가

유럽을 중심으로 동유럽 끝, 러시아를 중심으로 보면 서쪽 끝. 어느 쪽에서 봐도 끄트머리에 낀 우크라이나. 나라 이름도 폴란드어로 '주변 땅'이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라는 이름도 러시아 어로 변방이라는 뜻도 된다. 물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하면 '미녀들이 많은 나라' 정도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Kiev)를 가기 위해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Chișinău)에서 기차를 타고 장장 15시간을 달려야 했다. 기차표는 4만 원이 채 안 됐다.

몰도바에서 밤 기차를 타고 15시간을 달려 다음 날 오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했다. 이동학 작가

몰도바와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순위에서 1, 2위를 다툰다. 기차의 수준도 옛 소련 시절부터 쓰던 기차가 아직도 다니고 있으며, 일부 현대식 기차가 섞여 있는 정도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왼쪽 끝, 유럽의 동쪽 끝에 있다.

오후 11시쯤 키시나우를 출발한 기차는 국경을 지난 뒤 다음날 점심 시간이 좀 지나 키예프에 도착했다. 국경을 지날 무렵 세관 요원들이 여권과 짐 검사 등을 하는데 삼엄하진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 뿐이었다.

보통 대중 교통비를 보면 그 나라 물가가 어느 정도 인지 짐작할 수 있다. 키예프를 처음 갔던 2018년 4월 기준, 지하철 이용료는 5흐리브냐(UAH)로 200원 정도였다. 버스비는 3흐리브냐다. 우크라이나의 마트에서 파는 생활 필수품과 식재료 가격은 한국의 절반 정도로 쌌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생활 물가는 낮지만, 식당서 파는 음식 가격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학 작가

그러나 식당의 음식 가격은 경제 수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물가 상승률은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폭등해 24.9%를 기록한 뒤, 2015년 43.3%로 더 치솟았다. 이후 소강 상태를 보이며 낮아져 2018년 9%를 나타냈다.

1인 당 국내총생산(GDP)가 4,000달러 이하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만나보면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우크라이나 경제에서 지하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노동자와 이들을 고용하는 기업 사이에 이면 계약이 널리 퍼져있다.

정부에 내야하는 세금을 아끼기 위해 기업은 노동자에게 실제 액수보다 낮은 금액으로 노무 계약을 맺기를 원한다. 노동자 역시 세금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한 방법이기에 이러한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혁명, 또 혁명...그러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 키예프 독립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 네한다라디오 홈페이지

우크라이나 경제가 지하화 한 것은 정치권에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실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100년 전으로 가야 하지만, 먼저 2004년의 오렌지 혁명부터 시작해보자.

당시 쿠츠마 대통령이 임기를 다하자 치르게 된 대선은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와 야당 후보 빅토르 유센코(Віктор Ющенко)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대선 두 달 전 유센코 후보가 보안국 관료들과 식사 직후 독살을 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여당 측 또는 러시아에서 친러파인 여당 후보를 돕기 위해 꾸민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시민들의 비판 여론이 들끓었음에도 ①대선에서 여당의 야누코비치가 2.5% 포인트 차로 승리한 것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이후 ②부정 선거 사례가 드러나면서 키예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③선거위원회와 대법원이 나선 끝에 재투표를 실시, 결국 과반을 겨우 넘긴 채로 유센코 후보가 이겼다. 오렌지 혁명으로 정권을 바꾼 것이다.

2007년 4월 빅토르 유센코(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의회 지도자들과 협상에 들어가기 전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센코 후보는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율리아 티모센코(Yulia Tymoshenko)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해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티모셴코는 총리가 되자 친 유럽 노선을 외쳤다. 친 러시아 정치 세력의 눈치를 보던 유센코 대통령과 노선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대립하게 된 것. ④대통령은 결국 티모센코 총리를 해임했고, 국회를 해산한 뒤 재선거를 실시했다.

심지어 ⑤대선 당시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는 등 정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후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급성장하던 우크라이나는 GDP가 30% 이상 곤두박질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⑥다시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 친유럽→친러시아로 또 한번 노선이 바뀐다. 나토(NATO) 가입 철회,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 철수에 대해서도 주둔 연장을 결정해 버렸고, 이는 2014년 러시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크림반도(우크라이나 남부)를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 유로마이단 시위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표식이 수도 키예프의 길거리에 세워져 있다. 이동학 작가

무능한 정치와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역주의 대결 등으로 통합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 등의 가치는 우크라이나에서 사라졌다.

⑦EU와의 협력 협정 체결을 잠정 중단한다는 이유로 시작된 시위는 경찰과 대치로 사상자가 나오는 등 극단으로 치달았다. 2013~2014년 5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 당한 것이다.

결국 ⑧대통령이 탄핵되고 조기 대선이 결정됐는데 이 시위를 유로마이단 시위라고 일컫는다. ⑨유로마이단 시위 이후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는 초콜릿 과자업체를 운영하던 중견 기업의 백만장자 오너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기업을 운영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끊어내겠다며 대통령에 당선되면 기업의 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탄핵을 통해 대통령을 바꾸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민들은 정치인은 다 똑같다는 인식을 굳히게 됐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희망을 내려놓았다.

"이 도시를 떠나는 게 꿈이에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한 빵집에서 만난 여성들은 스스로 생활력이 매우 강하다고 말했다. 이동학 작가

한편 지하 경제가 포함된 임금이 300~400달러인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미래를 계획하거나 준비할 수 없다. 소련 연방에서 독립된 한때 5,200만 명(1991년)에 달했던 인구는 이후 꾸준히 줄면서 25년이 지난 현재 4,200만 명이다. 무려 1,000만 명이 감소한 것.

특히 해외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고, 경제 위기 이후로는 젊은이들이 출산을 꺼리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많은 인구가 이탈리아로 이동했고, 이탈리아의 이민자 중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보다는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키예프 중심가의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셰브첸코(32)는 러시아로 가는 게 꿈이다.

"이미 몇몇 친구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에서 자리를 잡았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출신 청년들이 해외에서 잡은 일자리는 대부분 3D 일자리. 해당 나라 사람들이 일하길 꺼려하는 분야다. 셰브첸코 역시 친구들처럼 유럽으로 가도 좋겠지만 자신은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길거리를 젊은이들이 걷고 있다. 이동학 작가

저출산, 고령화 국가를 따져볼 때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함께 높은 순위에 있는 나라다. 1990년 1.85였던 합계 출산율은 2001년 한때 1.07을 기록했다. 2012년 1.53까지 오르는 듯했으나 이후 다시 낮아지며 2017년 1.37을 찍었고, 이는 다시 2019년 1.2까지 떨어졌다.

키예프의 출산율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난 셰브첸코를 통해 5세 남자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보슬로브스카(Inna Bohoslovska)를 소개 받아 이야기를 더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결혼을 하고도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뒤 출산을 했는데도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는 곁에 없고 그 결과 출산·보육은 여성들이 홀로 떠안게 되고, 여성들은 경제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자신의 남편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여성들은 학위 취득률도 남성보다 더 높고, 전체 취업 인구 중 여성의 비율이 55.7%에 이르는 등 남성보다 왕성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소련 시절 여성의 완전 고용을 목표로 했던 관성이 남아있던 이유도 있지만, 우크라이나 사회 전체가 여성들의 자립심을 중요하게 여겨 왔던 영향도 있었다. 특히 여성 취업률은 80%에 달하며, 중소 기업 경영자의 30%가 여성이라고 한다.

반면 고위 공직을 맡는 여성의 비율 등 질적인 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임금에서도 남성의 80% 수준에 그친다. 게다가 10만명 이상의 여성이 윤락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도 있다.

남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 건물의 외벽에 자유를 갈망하는 글귀가 인상 깊다. 이동학 작가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무책임하게 떠난다는 여성들의 얘기를 듣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여러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가 부족해서'라나.

실제로 다른 나라의 침략이 그칠 날이 없었던 우크라이나는 수 많은 남성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목숨을 잃었고, 이는 우크라이나 남녀 평균 수명에서 여성에 비해 남성이 10년이나 덜 산다는 통계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라는 말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르완다 키갈리로 파병왔던 군인에게서 받았던 전투 식량. 이동학 작가

현재까지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 동남부 전선 700㎞에서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 국지전이 이어지며 사상자가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이란다. 동부 전선에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아프리카로 파견 온 우크라이나 군인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르완다에 갔다가 지금은 키예프로 돌아갔지만, 르완다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전투 식량을 나눠 주기도 했다.

다시 돌아와서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남녀 성비는 0.85:1로 남성이 적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결혼을 경험한 남성을 만나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무책임하게 가족을 내팽개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다룬 언론 기사를 현지에서 찾으려 했더니, 오래 전부터 그래오다 보니 우크라이나에서는 자연스럽게 여기고 특별한 일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9일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대치 중인 동부 돈바스 지역 전선을 방문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2일 방영된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로부터 말이 아닌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보실 제공·연합뉴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징병제 국가다. 2014년 우크라이나는 마지막 징병을 끝으로 더 이상 징병제를 운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침공했고, 우크라이나는 징병제 폐지 결정을 번복한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에 환호했던 스무살 청년들은 결국 무조건 군대를 가야하는 현실에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수 십만의 남성들이 군대로 가 있는 현실과 그렇지 않아도 남성이 적은 현실을 고려할 때 '남자 쟁탈전'이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국내에서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한 여성들은 외국인 남성을 만나 ①결혼②우크라이나 탈출을 동시에 꿈꾸기도 한다. 때문에 이 수요를 연결하기 위해 유럽과 북미 등 남성과 우크라이나 여성을 연결하려는 결혼 중개 회사가 성행하고 있다.

한국 남성과 우크라이나 여성의 결혼 건수는 비자 발급 기준으로 한 달에 1~3건 정도였다.

나빠지는 나라 재정...출산 육아에 허덕이는 여성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만난 청소년들. 이들은 K팝을 듣고 길거리와 연습실 등에서 댄스를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동학 작가

우크라이나 사회의 성비 불균형과 느슨한 가족 관념 등에서 비롯한 여성의 육아 독박 문제는 점점 심각해 지지만 이를 돕는 법적, 문화적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지 않다.

소련 해체 이후엔 재원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다 보니 사회 복지 체계가 전반적으로 무너졌다. 의료 서비스는 무상으로 제공하지만 그 질이 평균 이하라는 게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의료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도 높지 않다.

국가가 교육에 쓸 수 있는 재정도 열악하다 보니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고, 교사들 역시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결국 교육 체계가 무너지고 문을 닫는 학교도 많다.

국가 전체가 끊임없이 부침을 겪다 보니 출산 육아는 여성들이 겪는 문제로 여겨질 뿐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을 만한 계기도 시도도 없다.

키예프에서 만난 보슬로브스카는 국가가 3년 동안 월 4만원의 기본 양육비를 주지만 큰 도움은 안 된다고 했다. 보통 아이의 아빠에게 위자료를 청구하면 남자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주게 돼 있지만, 자신처럼 아이 아빠를 못 찾는 경우가 많아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최근 세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2019년 4월 진행된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가 당선된 것이다.

러시아보다는 다른 유럽나라들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공약한 그는 친 러시아파가 많이 살고 있는 동부와 남부에서도 승리하며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겼다. 이는 친러나 친서방을 떠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기성 정치권에 얼마나 실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정치인 출신의 후보들을 떨어뜨리고 젤린스키의 당선은 앞서 펼쳐졌던 두 번의 혁명보다 더 큰 기대감이 반영돼 있다. 키예프는 과연 젊은이들이 떠나려 하는 도시에서 돌아오고 싶은 도시로 바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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