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보다 대선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곳은 출판계다. 본격 등판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이 제목에 콕 박힌 책 출간으로 ‘간접’ 출사표를 던지며 몸 풀기에 나서는 건, 대선 주자들의 오래된 공식. "정치인 입장에서 공적 자아 말고 친밀한 사적 자아를 대중에게 보여주면서 진심을 어필하는 수단으로 아직까지는 책 만한 게 없어서"(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대표)다.
1년도 채 안 남은 대선, 정치인들의 책 출간 러시로 출판계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대선 레이스가 아직 달궈지지 않은 만큼 본인이 직접 저자로 나서기보다는 제3자가 쓴 인물과 리더십 탐구서가 주류다.
가장 ‘핫’한 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재·보궐 선거가 여권의 참패로 끝나자마자, 대선주자로 윤석열을 띄우는 책 2권, ‘윤석열의 진심(체리 M&B)’, ‘구수한 윤석열’(리딩라이프북스)이 잇따라 출간됐다. 두 책은 출간 직후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판매 순위 2위, 3위에 오르며 나름대로 순항 중이다. '구수한 윤석열'은 일단 초판 2,000부를 소진했다고 한다.
지난 2월 설 연휴를 앞두고 나온 ‘윤석열 국민청문회’(지식공작소)까지 합하면 3권 모두 본인이 직접 쓴 건 없다. 윤석열이 궁금한 대학교수가, 고교 동창이, 대학 동기들이 대신 전하는 윤석열이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대망론이 일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관련 서적이 수십 종 쏟아졌는데 본인이 직접 쓴 건 단 한 권도 없었던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윤 전 총장 측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지만, 급부상한 정치인의 몸값을 입소문내는 데는 득이다.
문재인정부의 국무총리 선후배인 정세균 국무총리와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책 출간으로 대선 출정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모양새다. 타이밍을 먼저 잡은 건 대선 출마를 위해 조만간 총리직 사퇴에 나설 것으로 알려진 정세균 총리다. 최근 출간된 ‘법 만드는 청소부’(이불)는 정 총리의 20년지기 보좌관이 정치인 정세균의 삶의 궤적을 훑은 회고록이다. 정치인 책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의식한 듯 "정치인 책 같지 않은 책"을 표방한다고 적었다.
재·보선 패배 책임으로 대선 기상도가 흐려진 이낙연 전 대표도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을 직접 출간하며 반등의 기회를 노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월 총리직을 내려놓은 이후 ‘이낙연은 넥타이를 전날 밤에 고른다’(북콤마) 등 주변 인사나 작가가 쓴 책만 해도 7권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중에게 가 닿지 못했다는 내부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대선에서 경선 레이스를 펼친 이재명 경기지사의 책은 '인물'에서 '정책'으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2017년 당시엔 이재명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정치 비전과 리더십을 말하는 에세이 '이재명, 대한민국 혁명하라'(메디치미디어), '이재명의 굽은 팔'(김영사) 등을 본인이 직접 썼다면, 최근 나온 ‘이재명과 기본소득’(오마이북) 등은 이재명의 정책과 도지사로서의 행정 성과, 추진력을 알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 거론되는 대선주자 중 출판계에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한 정치인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아닐까 싶다. 대선 패배 이후 정계 복귀 과정에서 ‘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21세기북스) 등을 펴냈던 그는 정치인 이전에 기업인으로서 직접 쓴 책만 17권에 달한다.
정치인 책은 봇물 터지듯 출시되지만, 출판사 입장에선 '계륵' 같은 존재란 말도 나온다. 지지세력의 구매력이 예전만 같지 못한데다 괜한 '정치적 꼬리표'까지 달리는 게 부담스러워서다. 출판계에선 정치인 책이 '공공재'로서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선 서사의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 출판사 대표는 "시류에 편승한 정치인 책들이 많아지면서 가치가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결국 1인자가 됐던 인물들의 책은 분명 울림을 줬다. 정치인이 시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척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장은수 대표도 "꿀 발라 놓은 미담과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용비어천가는 대중으로부터 진정성을 의심받기 좋고, 공감 대신 반감을 키울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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