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인공은 절절한 ‘그리움’이다. 1947년생 강은택씨는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년 시절 입었던 저고리를 조심스레 내보였다. 고운 색감이 하나도 바래지 않았다. 쌀 포대로 만든 안감도 고스란히 남았다.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아버지. 아들은 90년 된 저고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를 마주한다.
1947년생 안순실씨에겐 은비녀가 어머니다. “서울 선비처럼 잘 생겼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죽음은 너무 간단했고, 학살은 순식간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을 보낸 뒤 아이들 먹여 키우느라 고생스럽게 일만 하다 갔다. 평생 머리에 쪽진 비녀는 어머니의 “너무 작고 가벼운 한 조각의 뼈”였다.
두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73년 전 제주의 비극이었던 4·3 사건으로 희생됐다. 왜 죽고, 왜 죽이는지도 몰랐던 학살의 광기 속에서 민간인 3만여 명이 죽었다. ‘기억의 목소리’는 4·3 사건의 희생자 유품을 사진과 시, 인터뷰로 기록한 책이다.
토벌대를 피해 산에서 지낼 때 밥해 먹은 밥그릇,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렸던 아버지의 성경책… 73년 전 제주 곳곳에서 말 없이 참혹한 현장을 지켜봤던 사물들은 “망각보다 오래 살아 남아” 애도받지 못한 채 떠났던 억울한 이들의 잃어버린 삶을 대신 기억하고, ‘빨갱이’ ‘폭도’란 누명을 쓴 채 숨죽여 산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죽은 자와 산 자는 그렇게 조각난 생애의 기억을 잇는다.
성산일출봉, 함덕해수욕장, 섯알오름, 다랑쉬오름, 정방폭포, 표선해수욕장 등 제주의 대표적 관광지는 4·3 사건 당시 집단학살터였다. “제주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4·3 영령들의 피의 대가로 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제주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고현주 작가) “평화를 소망하기 위해서는 평화의 반대 감각 또한 기억해야 한다.” (허은실 시인) 다시 찾아온 제주의 봄, 무엇을 기억하고 되새겨야 하는지 책은 가만히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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