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차별 없다" 결론에 각계각층 반발
5년간 학교서 인종차별 사건 6만건 달해
노동시장 왜곡·노예무역 미화 비난 쇄도
소수인종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공부를 잘하면 ‘인종차별’이 없는 걸까. 영국 정부가 “더 이상 영국에는 제도적 인종차별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아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영국 정부 산하 ‘인종ㆍ민족 차별 위원회’는 “인종적 부당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영국에는 더 이상 소수인종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제도가 없다”는 내용의 264쪽짜리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교육, 고용, 사법체계, 보건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인종 및 민족 차별 현황을 분석한 뒤 “영국은 백인이 주류인 국가들의 모델이 될 만하다”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특히 논란이 되는 건 학업 성적이 인종평등의 근거로 제시됐다는 사실이다. 보고서는 “많은 소수인종 학생들이 백인 학생만큼 공부를 잘하거나 훨씬 더 잘한다”면서 “교육은 소수인종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성공 사례”라고 주장했다. 학업 성취도와 인종 간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실제 현실과는 무관한 자의적 해석이란 지적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영국 학교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사건은 무려 6만건에 이른다.
보고서는 또 노동시장에서 백인과 소수인종 간 임금 격차가 2.3%로 10년 만에 가장 낮았고, 법이나 의학 같은 전문영역에서 인종 다양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통계도 앞세웠다. 그러나 2019년 기준 영국 실업률은 백인 4%, 소수인종 7%였고, 16~24세 연령층에선 10%와 19%로 격차가 더 벌어졌으며, 특히 흑인과 방글라데시인은 각각 26%와 24%로 4명 중 1명이 실업 상태였다. 조합원 62만명인 영국 최대 노동조합 GMB노조는 “제도적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며 수백만 흑인ㆍ소수인종 노동자들이 직접 경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나아가 ‘흑인(Black)ㆍ아시아계(Asian)ㆍ소수민족(Minority Ethnic)’을 지칭하는 약자 ‘BAME’를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모든 차별의 근본 원인이 다수 대 소수의 차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환원주의적 발상”이라는 얘기다. 또 학교에서 영국 식민시대를 교육할 때 노예무역문제뿐 아니라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계 영국인으로 바뀌었는지에도 초점을 둬야 한다는 권고도 담았다. 노동당은 “어떻게 노예무역을 미화되는 내용이 발간될 수 있었는지 당장 설명하라”고 반발했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해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 이후 전 세계로 번진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 시위를 계기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정부에 위원회를 만들고 인종차별 조사를 지시하면서 나오게 됐다. 가디언은 “위원회 구성원 대다수가 1970~80년대 관점으로 인종 문제를 다뤘다”며 “40년 전보다 인종차별이 덜하면 더 이상 긴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것이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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