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찾아 700리... 삼척 미인송이 정이품송 혼인목으로 뽑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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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찾아 700리... 삼척 미인송이 정이품송 혼인목으로 뽑힌 이유

입력
2021.03.30 17:00
수정
2021.03.3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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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뿌리 삼척 준경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무덤인 삼척 준경묘. 깊고 깊은 산중이지만 아름드리 소나무로 둘러싸인 묏자리가 넓고 아늑하다.

“신랑 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 신부 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 무슨 아이들 소꿉놀이인가 싶지만 2001년 5월 8일 세계 최초로 치러진 나무 혼례식 주인공이다. 두 학생은 신랑 나무와 신부 나무 역할을 대신했다. 주례는 당시 산림청장이었고, 신랑 측 혼주는 보은군수, 신부 측은 삼척시장이 맡았다. 신랑 나무의 주인공은 벼슬 받은 소나무, 보은의 정이품송이다. 그럼 신부는? 삼척 미로면 깊고 깊은 산중에 있는 미인송이다. 조선 왕조의 뿌리라 할 준경묘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다.

준경묘 가는 길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주차장에서 묘까지는 약 2km, 절반은 가파른 오르막이고 나머지는 산기슭으로 이어져 비교적 순탄하다. 내키지 않는 성묘객이라면 조상에 대한 원망을 한 바가지는 쏟아낼 법한 산중이다. 그럼에도 이 묘에는 매년 4월 전주 이씨 가문의 어르신들이 노구를 이끌고 찾아와 제를 올린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이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첫 번째 용으로 떠받드는 목조 이안사의 부친이다.

준경묘 가는 길은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시멘트 포장길과 목제 계단으로 오르는 옛길이 있다.

힘겨운 오르막길이 끝나면 그제야 주위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소나무가 포근하게 길을 안내한다. 묘소가 가까워질수록 솔숲은 울창함을 더해간다. 미인송은 묘소 앞 산책로 오른쪽 보호 울타리 안에 있다. 매끈하게 뻗어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시선이 꼭대기에 닿는다. 혼인 당시 수령이 95년, 키 32m, 가슴높이 둘레 2.1m였다. 혼인목 선발 과정은 왕비를 간택하는 것처럼 까다로웠다. 수형이 빼어난 전국의 524그루 소나무 중에서도 형질이 우수한 것으로 판명된 나무를 골랐다. 조선의 뿌리에 닿아있다는 상징성도 고려됐다. 나무 혼례식은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채취해 미인송과 인공 교배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이렇게 얻은 후계 나무 중 DNA 분석과 유전자 다양성 등을 평가해 58그루를 ‘장자목(長子木)’으로 명명했다.

매끈하게 뻗은 준경묘 앞 미인송. 수형과 형질이 빼어나 정이품송의 혼인목으로 선택됐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준경묘가 보인다. 깊은 산중이지만 터가 넓고 아늑하다.

미인송에서 다시 산책로로 접어들면 드디어 정면으로 준경묘가 보인다. 깊은 산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터가 넓고 아늑하다.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편안함이 느껴져 누가 봐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왕실묘로 대접받고 있으니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우선 백우금관(白牛金棺) 전설이 있다. 목조가 부친의 묏자리를 구하려 헤매다가 쉬고 있는데, 어느 도승이 ‘이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겠구나’라며 혼잣말을 한다. 자세히 알려 달라 청하니 ‘장례 때 소 100마리를 잡고, 관은 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당시 살림살이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꾀를 냈다. 처가에서 기르는 흰 소(白牛) 한 마리로 100 마리를 대신하고, 황금색 보리 짚으로 금관(金棺)을 대신했다. 물론 지어낸 얘기지만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하다.

준경묘 가는 길과 주변은 온통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재질이 단단하고 쉽게 썩지 않아 고급 목재로 이용되는 황장목이다.


준경묘 앞 진응수. 용의 지세가 왕성해 지상으로 분출하는 샘물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준경묘 뒤편으로도 울창한 솔숲이 이어진다. 일부는 경복궁과 숭례문 복원 공사 때 목재로 쓰였다.

묘는 정면의 안산을 중심으로 왼쪽에 근산과 방위산, 오른쪽에 대명산과 역마산이 감싸고 있다. 이들 다섯 봉우리가 조선 왕조 500년을 이은 근간이었다고도 해석한다. 홍살문 앞에는 진응수(眞應水)라는 샘물이 솟는다. 산 능선의 기세가 왕성해 지상으로 분출하는 물이라 설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준경묘가 왕실묘로 인정받은 것은 형식상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인 1899년, 대한제국 시대다. 봉분 주위로 석축을 두르고 주변을 정비한 것도 이때였다. 제실 옆에 세운 비석에 ‘대한준경묘’라고 쓴 고종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준경묘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에도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상처로 있다.


준경묘 가는 길 주변에 현호색 빛깔이 화사하다. 눈 밝은 탐방객이라면 산괴불주머니, 노루귀, 바람꽃 등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준경묘 입구 활기마을의 성황당. 황제의 기운, '황기'가 변해서 활기리가 됐다고 전해진다.

준경묘의 소나무와 조선 왕조의 인연은 근래까지 이어졌다. 묘소 뒤편 솔숲에 아름드리 나무를 벤 그루터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복궁과 숭례문을 복원할 때 이곳의 소나무 20여 그루가 목재로 사용됐다. 솔 향기 짙은 산책로를 걸으면 500년 왕조의 흥망성쇠가 꿈결처럼 여겨진다. 부인의 묘소인 영경묘는 골짜기 하나를 넘어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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