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겸손...'200년 호황' 상인 집안의 철학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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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과 겸손...'200년 호황' 상인 집안의 철학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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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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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산시성 ③치현 단풍각과 거가대원

산시성 치현의 자오위고성 동문, 진상라오제(晋商老街) 입구. 치현은 명청시대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다. ⓒ최종명

사람들이 우르르 성문을 나서고 있다. 무심코 따라갔다. 평평하던 땅이 갑자기 낭떠러지로 변했다. 그런데 누각 하나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다. 절벽을 따라 수백 그루의 단풍나무가 절절하게 폈다. 기상천외하구나! 꿈자리가 수상했다.

눈을 뜬 대정식(1618~1691ㆍ명말청초의 학자)은 누각에 새겨져 있던 단풍(丹枫) 두 글자가 여운으로 남았다. ‘나의 자(字)가 풍중(枫仲)이 아니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명나라 ‘붉을 주(朱)'씨 왕조가 떠올랐다. 세 박자가 맞았다. 단풍각(丹枫阁)을 건축했다. 청나라 초기 1660년 일이다. 처음에는 반청복명의 소굴이 될 줄 몰랐다. 진상(晋商)의 고향인 치현(祁县)으로 간다.

치현은 진중시(晋中市)의 유일한 외자 현이다. 전국에 100여 개, 산시성에 14개가 남았다. 기원전 556년 진평공이 대부 희해(姬奚)에게 식읍을 하사했다. 성을 '기(祁)'로 바꾸니 영토 이름이 됐다. 2,500년 동안 수많은 왕조를 거쳤는데 지명은 그대로다. 명청 시대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오위고성(昭馀古城)이 가장 번화하다. 성도인 타이위안에서 남쪽으로 약 80㎞ 떨어져 있다. 차단막이 있는 진상라오제(晋商老街)에 도착한다.

치현 자오위고성의 진상라오제. 차는 들어갈 수 없는 거리다. ⓒ최종명


포용은 바다처럼, 검허함은 골짜기처럼...긴 세월 품행 지킨 상방의 면모

고성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없다. 활기차게 거니는 사람,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오가는 모습이 여유롭다. 가게 깃발이 늘어섰고 때 묻은 지붕이 다닥다닥 붙었다. 남북과 동서로 십자로다. 1㎞가량 길이 이어진다. 골목은 셀 수 없이 많다. 5세기 후반 북위 시대에 처음 조성됐다. 여전히 서민이 살아가고 있다. 채소, 곡식, 음식, 잡화, 옷, 문구, 철물, 골동품, 핸드폰 등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약국과 병원, 이발소도 있다. 오래된 기억을 담은 공간이자 삶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고성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 보인다. 동문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약 500m를 걸으면 단풍각이다.

치현의 단풍각. 청나라 초기의 학자 대정식이 꿈을 꾸고 난 뒤 지었다고 한다. ⓒ최종명

단풍각은 청나라 강희제에게 골칫거리였다. 반청복명을 주도한 사상가 고염무는 무림 고수를 모으기 위해 표국(镖局)을 세웠다. 표국은 상품 운송과 경비를 담당하는 전문 집단으로, 상당한 수준의 무술을 익힌다. 표국의 이름을 염풍(炎枫)으로 짓고 청나라 군대와 대항했다. 전투는 매번 치열했고 17년 동안이나 저항했다. 단풍각이 소굴이었다. 청나라의 유화정책으로 명나라 부활은 요원해졌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객잔이 됐지만, 당시의 ‘단심’이 잊힐 리 있겠는가.

치현의 거가대원 입구. 청나라 때 세운 거상의 저택이다. ⓒ최종명

고성의 동쪽 절반은 모두 거씨 일족이 차지했다. 거반성(渠半城)이라 했다. 10여 개의 저택, 1,000칸이 넘는 규모다. 거가대원(渠家大院)은 치현 상방을 대표한다. 청나라 건륭제 때 거구여(渠久如)가 세운 저택이다. 씨족 모두 활발하게 상업에 나섰다. 진상문화박물관 간판이 걸렸다. 아치형 대문에 걸린 납천(纳川) 현판은 거상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동진 역사가 원굉이 지은 ‘삼국명신서찬’에 방촌해납(方寸海纳)이 나온다. 당나라 시대에 이주한이 주석을 달았다. 마음을 비유하는 말인 ‘방촌’은 모든 하천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는 해납백천(海纳百川)과 같다고 평가했다. 포용하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는 뜻이다. ‘납천’ 두 글자에서 보이지 않는 바다를 봐야 세상을 주무르고 뻗어가려는 포부를 이해할 수 있다.

치현 거가대원의 거본교 조각상과 당시 화폐인 원보. ⓒ최종명

거씨 조상이 명나라 초기에 치현으로 이주했다. 명나라를 거치며 장사로 점차 명성을 쌓았다. 청나라 후기 19세기 중반인 17대손에 이르러 전국을 주무르는 상인이 등장했다. 사촌 형제간인 거원조(渠源潮), 거원정(渠源浈), 거원감(渠源淦)이 거상으로 성장했다. 돌림자인 '원(源)'을 비롯해 모든 글자에 ‘물 수’가 들어가 있다. 이때가 황금시대였다. 입구에 거본교의 조각상이 서 있고 탁자에 당시 화폐인 원보가 쌓여 있다. 거본교는 거원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지방에서 치른 연이은 과거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했다. 수도에서 열린 시험에서도 상위권이었다. 관리로 근무하며 교육사업에 힘썼다. 경영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성냥 공장이자 산시성 최초의 민족 기업 쌍복화시공사(双福火柴公司)를 설립했다. 산시 최대의 채광 기업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거가대원 오진원의 약허재. ⓒ최종명

거가대원의 외관은 나무 벽돌 돌로 조각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실내 공간은 박물관이라 대부분 전시실이다. 거상의 저택이라 약간 긴장된다. 상인의 재력이 인문적 소양과 만나 꾸민 건축 문화는 동네마다 다르다. 다섯 번 문을 넘는 오진원(五进院) 입구에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가서 두 눈 크게 뜨고 살피니 겨우 약허재(若虚斋)라 쓴 글자가 보인다. 복숭아나무로 구현한 모습은 영락없는 연꽃이다. 테두리는 마치 물결이 일렁이는 듯하다. 종이를 구긴 듯 조각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북송 유학자 주돈이는 ‘애련설(爱莲说)’에서 출오니이부염(出污泥而不染)이라 했다. 진흙탕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았다는 연꽃이다. ‘노자’의 심오한 뜻이 담긴 허회약곡(虚怀若谷)에서 가지고 왔다. 겸허한 마음이 마치 골짜기처럼 깊다는 뜻이다. 거부를 자랑하지 않고 마음을 숨기는 태도는 높이 살 만하다. 오진원은 거원조의 장손인 19대손 거인보의 서재다.

치현 거가대원 패루원 문에 적힌 낙천륜과 인자수. ⓒ최종명


치현 거가대원의 패루원 덕성랑요. ⓒ최종명

오진원 서쪽 패루원(牌楼院)의 문은 낙천륜(乐天伦)이다. 가족이 내려주는 천륜을 즐긴다는 뜻이다. 다섯 개의 두공이 네 줄로 웅장하고 소나무와 대나무 벽화가 수려하다. 안에서 뒤돌아보니 인자수(仁者寿)를 새겼다. ‘논어’와 ‘중용’은 사람에 대한 사랑, 인이나 덕을 쌓으면 장수한다고 거듭 토로한다. 어진 이가 오래 산다는 말인지, 어질게 오래 살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논어’는 낙천륜을 지자락(知者乐)과 대구라고 말한다. 지자의 즐거움보다 천륜을 낙으로 삼는 일이 더 소중하긴 하다. 2층에 쓰인 덕성랑요(德星朗耀)는 멀리서도 보인다. 인덕을 갖춘 인물, 덕성이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이다. 거인보가 거주하던 장소다.

치현 거가대원에 전시된 단풍각 편액. 당대의 달필 부산의 작품이다. ⓒ최종명


거가대원 오진원의 신검덕 벽돌 문. ⓒ최종명

왼쪽 작은 방은 단풍각기(丹枫阁记) 전시실이다. 고염무와 절친인 부산이 단풍각 편액을 썼다. 부산과 대정식은 서원 동창이었다. 자연스레 셋이 의기투합했다. 부산은 대정식의 꿈 이야기를 듣고 단풍각을 세운 뜻을 행서체로 남겼다. 서첩은 모두 8장이며 매 장마다 7행씩 기록했다. 부산은 왕희지와 안진경에 버금가는 달필로 평가된다. 원본은 산시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벽돌로 문을 쌓고 신검덕(慎俭德)을 새겼다. 신중하고 검소하게 덕을 쌓으라는 뜻이리라. 벽화의 동물은 얼핏 보면 말과 비슷하다. 열매를 물고 새끼에게 주려고 길게 고개를 돌린 모습인데 기린은 아니다. 뿔이 돋았으니 영락없이 사슴이다. 벽돌을 낱개로 조각하고 이어서 쌓은 작품이다.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거가대원의 삼진원과 연비어약 현판. ⓒ최종명


거가대원의 표호 삼진원에 전시된 원보와 저울이 있는 창구. ⓒ최종명

오진원 서쪽으로 건너가면 통루원(统楼院)이 나온다. 1862년 거원정이 세운 삼진원(三晋源)이 있던 자리다. 19세기 후반 진상은 앞다투어 환어음을 관리하는 표호를 설립했다. 일종의 은행이다. 거씨 형제들에게 더 큰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도 표호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오른다는 뜻의 연비어약(鸢飞鱼跃)은 표호와 거원정 전시실이다. 솔개보다 멀리, 물고기보다 힘차게 솟구치며 사업이 발전하자 표호도 덩달아 성행했다. 실물 화폐인 원보는 무겁고 도적의 표적이다. 신용을 바탕으로 어음을 발행했다. 종이만 가져가면 전국 표호 지국에서 현금화가 가능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인 1924년까지 영업을 했다. 삼진원은 진상을 대표하는 3대 표호였다.

거가대원의 서방원. 도량형 전시관이다. ⓒ최종명


거가대원 도량형 전시관의 나판. ⓒ최종명


거가대원 도량형 전시관의 송나라 시대 저울추. ⓒ최종명

서남쪽 건물은 거본교가 거주하던 서방원(书房院)으로, 도량형 전시관이다. 세 곳으로 나눠 도구가 전시돼 있다. 도(度)에는 한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길이를 재는 기구가 있다. 밀도나 경도를 재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풍수를 재는 나판(罗盘)도 있다. 천간과 지지, 팔괘는 알겠지만 깨알 같은 글씨는 볼수록 알기 힘든 암호다. 양(量)을 재는 기구는 관두(官斗)가 많다. 곡식 한 말의 기준은 공정한 기관에서 지정해야 분란이 없다. 형(衡)은 저울인 천칭이다. 궁정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저울을 골고루 소개하고 있다. 저울추인 청타(秤砣)도 많다. 형태도 다양하다. 송나라 시대에 사용하던 12띠 동물 저울추가 신기하다. 상인에게 절대 필요한 물건이며 셈법이다. 셈이 어눌하면 장사도 쉽지 않다. 진상박물관에 딱 어울리는 전시다.

치현 거가대원의 후문을 나와 연결된 골목. ⓒ최종명


치현 만리차도 박물관인 장유천. '도덕위원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최종명

뒷문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다. 높은 담장을 빠져나와 약 100m 떨어진 만리차도(万里茶道) 박물관으로 간다. 차를 도매하던 차장(茶庄)인 장유천(长裕川)이다. 거씨 상방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차 판매다. 후베이성 양러우둥의 차 잎을 전량 수매해 직접 가공하고 유통했다. 몽골과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푸젠성 무이산 자락 샤메이고촌에서 입수한 차도 유통으로 연결했다. 청나라 후기에 진상은 앞다퉈 만리차도를 통해 엄청난 물량을 수출했다. 장유천의 전신인 장순천(长顺川)이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설립됐다. 1930년까지 명성을 지키고 있었으니 200년 이상 활황이었다. 입구로 들어가서 오른쪽 건물이 경리원(经理院)이다. 정방에 걸린 도덕위원본(道德为原本)을 보니 긴 세월 품행을 지킨 상인의 모습이 상상된다.

만리차도 박물관 장유천의 돛단배와 '하위운정' 편액. ⓒ최종명

재물의 원천이 널리 퍼진다는 재원광진(财源广进)과 순풍에 돛을 올리는 일범풍순(一帆风顺)을 새긴 배 한 척이 놓여있다. 차 상자를 잔뜩 실은 돛단배가 바람 따라 순행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돛 뒤로 보이는 하위운정(霞蔚云蒸)은 비록 명필은 아니어도 연한 하늘색이라 단아해 보인다. 뜻에도 낭만이 묻어난다. 노을이 무성하고 구름이 피어난다고 하니 말이다. 만리차도를 오가며 많은 고충을 접했을 테지만, 노을과 구름을 벗 삼았으니 보람도 컸으리라. 물론 아름다운 감상만 느끼고 고초와 고난을 함께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만리차도 박물관 장유천의 주자차와 '행상유요' 기록. ⓒ최종명

기둥처럼 만든 주자차(柱子茶)가 잔뜩 쌓여 있다. 운송하기 편리하게 차를 싸고 꽁꽁 묶었다. 정면에 행상유요(行商遗要) 제목의 글이 적혀 있다. 장유천은 남방에서 차를 구매해 북방으로 가서 판매했다. 직원이 지켜야 할 규율과 노정, 각 지방에 대한 묘사, 비용과 세금 등을 기록했다. 모두 7개 항목으로 77쪽 2만 자가 넘는다. 장유천의 경영 철학과 상인 정신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인데 원본은 유실됐다. 1917년의 필사본을 민간이 보유하고 있었고 1994년 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 진상 문화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다.

만리차도 박물관. 낙타 조각상 뒤 벽돌 지붕에 '선비 사(士)' 글자가 선명하다. ⓒ최종명

건너편 마당에 상인과 낙타 조각상이 있다. 육로로 이동할 때 낙타가 힘깨나 썼던 모양이다. 웃음기를 살짝 내비치는 낙타가 귀엽다. 상인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주인도 가끔 태워줬을 듯하다. 천천히 문으로 들어가다가 지붕이 불쑥 시선을 잡는다. 벽돌로 만든 지붕 마루에 하얗게 구멍이 드러난다. ‘선비 사(士)’다. 벽돌 몇 개를 빼내 바람구멍을 만들었을까? 도덕, 천륜, 인자에 대한 기억과 자동으로 오버랩된다. 네모나게 뚫지 않고 유교 정신을 시전하고 있으니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지붕 위의 선비, 그 기호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도 남을 듯하다.

만리차도 박물관의 '장유천' 현판. ⓒ최종명

출구 옆 건물 2층에 '장유천' 현판이 걸렸다. 1층에는 차의 신 육우가 앉아 있다. 당나라 시대 전국을 유람하며 차에 관한 경전을 저술했다. 차상인 장유천이 당연하게 감사할 일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제국주의 시대가 되니 유통이 쉽지 않고 차에 대한 수요도 줄었다. 장유천은 차 대신 소금을 유통했다. 해외 사업은 중단됐다. 10여 개에 이르던 지점은 일제의 점령 지역이 늘면서 하나씩 폐쇄했다. 마지막까지 상인 가문을 지키던 거인보는 해방 후 전 재산을 나라에 바친다.

치현 구여당 지붕에는 '사'자와 '길'자가 선명하다. ⓒ최종명


꿈의 저택 '단풍각', 객잔으로 변신한 반청복명의 소굴

박물관을 나와 고성 거리를 걷는다. 자꾸 지붕으로 시선이 날아간다. 구여당(九如堂) 저택에 '선비 사(士)'와 함께 '길할 길(吉)'도 있다. 선비 밑에 입(口)을 뚫으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했을까? 치현에 선비가 올라앉은 지붕이 꽤 많은 편이다. 이런 지붕 구멍을 지칭하는 말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지방에서도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날이 점점 저문다. 사람들도 귀가를 서두른다. 여행객도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치현 단풍각 객잔. ⓒ최종명


치현 단풍각 객잔의 마당과 숙소 내부. ⓒ최종명

단풍각으로 다시 간다. 1917년에 문을 연 굉진은호(宏晋银号) 유적지이기도 하다. 은호는 표호보다 규모가 작은 금융기관이다. 청나라 황제의 근심이던 단풍각을 그냥 보존했을 리가 없다. 세월이 흘러 전장(钱庄)이었다가 2013년에 객잔이 됐다. 옛날 진상 저택과 비슷한 구조다. 방은 40칸이 넘는 듯하다. 우리 돈으로 3만5,000원가량이면 하룻밤 묵을 수 있다. 문을 두 번 지나 가장 안쪽 건물로 안내받았다. 화장실 딸린 방이며 나름 깔끔하다.

홍등이 불을 밝힌 단풍각 객잔에서. ⓒ최종명

어둠과 함께 홍등이 빛나기 시작한다. 객잔에 불이라도 난 듯하다. 우국충정을 쏟아내던 단풍각이다. 비록 당시의 누각은 아니라 해도 역사는 고스란히 남았다. 뒤늦게 찾아온 여행객이라고 민숭민숭하게 밤을 보내긴 어렵다. 자작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고염무의 사상을 펼쳐본다. 부산의 서예 솜씨도 그려본다. 비몽사몽 중에도 글자를 떠올린 대정식의 마음이 마구 달려오고 있다. 진상의 땅, 단풍처럼 새빨간 감회에 젖는 밤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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