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성향 집권당 "협약이 전통적 가정 훼손" 주장
터키 여성살해 10년간 3배 증가… 여성인권 최악
국제사회 "터키 여성들과 연대"… 터키정부 규탄
터키에서 ‘여성인권’은 또 한 걸음 후퇴했다. 터키 정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유럽평의회 조약, 이른바 ‘이스탄불협약’에서 탈퇴했다. 주요 도시에서 협약 탈퇴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유럽 각국이 비판 성명을 내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2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이스탄불협약 탈퇴 명령을 내렸다. 이스탄불협약은 가정폭력과 여성 할례, 강제 낙태 및 강제 불임, 성희롱, 명예를 빙자한 범죄 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터키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등 40여 개국이 참여한 이 협약에 가장 먼저 서명한 나라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성향 집권당 내부에서 이 협약이 이혼을 조장하고 전통적 가정을 훼손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협약 탈퇴로 이어졌다. 일부는 협약의 성평등 원칙에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왜곡했다. 푸앗 옥타이 부통령은 “전통적인 사회 구조를 보존하면 터키 여성들의 존엄이 보호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여성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날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 전국 곳곳에서 여성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정부의 협약 탈퇴에 항의하며 에르도안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쳤고, 거리는 여성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보라색 깃발로 물결을 이뤘다. 유명 소설가 엘리프 샤팍은 “여성 대신 살인자를 보호하겠다는 편견과 가부장제, 무자비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제1야당 소속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시장도 “여성들이 수년간 투쟁을 통해 이룬 성과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성토했다.
실제 터키에선 여성이 연애ㆍ동거ㆍ혼인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ㆍ여성살해)’와 가정폭력이 심각한 수준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터키에서 ‘여성살해’ 사건은 지난 10년간 3배나 증가했고, 올해만 벌써 78명이 의심스러운 정황 아래 살해되거나 사망했다. 터키 여성 38%가 평생 가정폭력에 시달린다는 세계보건기구(WHO) 조사 결과도 있다.
국제사회도 터키 정부를 규탄했다. 마리자 페이치노비치 부리치 유럽평의회 사무총장은 “이 협약은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며 “터키의 이번 결정은 터키와 그외 모든 지역에서 여성 보호를 위한 노력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독일 외교부도 “문화적ㆍ종교적ㆍ국가적 전통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명분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고, 프랑스 외교부는 “터키 여성들과 연대할 것”이라며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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