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후손이 어쩌다 '나라의 좀'이라 조롱 받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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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후손이 어쩌다 '나라의 좀'이라 조롱 받게 됐나

입력
2021.03.13 10:00
수정
2021.03.1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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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산시성 ② 위츠의 허우거우 고촌과 타이구의 쿵샹시 고거

청나라 말기까지 전국을 주무르던 양대 상방이 있다. 후이저우 상인과 산시 상인이다. 휘상의 툰시(屯溪), 진상의 진중(晋中)이 중심이다. 수백 년 진상 문화를 품고 있는 진중시는 2개 구, 8개 현과 1개 현급시를 아우르고 있다. 타이위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시간, 동남쪽에 시 정부가 있는 위츠(榆次)에 도착한다. 기원전 전국시대 이름 그대로 남았다. 환승해서 다시 1시간, 황토고원의 농경 마을인 허우거우고촌(后沟古村)으로 간다.

‘사람이 근면해야 토지가 풍성하다’ 겉치레 없이 담백한 산골

허우거우고촌 입구의 '농경문명' 조각상. ⓒ최종명


허우거우고촌 입구의 아름드리 나무. ⓒ최종명

밭을 갈아엎는 소와 농부 조각상이 맞아준다. 황토로 둘러싸인 산골에 75가구, 약 250명이 거주하는 장씨 집성촌이다. 당나라 시대인 819년에 처음 마을을 조성했다는 묘비가 발견됐다. 1,200년 전부터 살았던 천년고촌이다. 해발 900m 고지의 흙먼지 속에서 농사에 힘쓰며 열심히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촌스러운 외관에 비해 속살은 깊다. 민속학자 화가 건축가 학자 등으로 구성된 민간예술가협회가 답사를 거쳤다. 2003년에 농경문화유산의 표본으로 선정한 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을로 들어서니 수령이 500년도 넘은 아름드리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황토로 뒤덮인 산 사이에 형성된 허우거우고촌. ⓒ최종명

황토를 쏟은 듯한 야트막한 산 2개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사십리 용문하(龙门河)가 흐르고’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이룡희주(二龙戏珠) 마을’이라 자랑한다. 두 마리 용이 불쑥 솟았기에 비가 내리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배수로를 만들었다. 빗물은 집마다 설치한 수구를 거쳐 빠르게 빠지도록 구상했다. 물을 사용하면서도 홍수로 인한 피해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창의적인 배수 체계라고 칭찬했다. 황토 고원에 소나기가 뿌리는 날이면 산사태가 나거나 황하의 범람이 빈번한 나라가 아니던가.

산속 깊이 살았기에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신앙으로 세운 공간이 많다.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민간신앙도 수두룩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에 18개의 묘우(庙宇)가 있다. 동쪽에 문창묘, 서쪽에 관제묘를 배치해 동문서무(东文西武)를 갖췄다. 복판에 옥황전, 남쪽에 관음당, 북쪽에 진무묘를 안배했다. 주사위를 던져 정한 위치가 아니다. 천년 세월을 거치며 길흉화복을 염원하는 공동체의 동의로 이룬 산물이다.

허우거우고촌의 옥황전. ⓒ최종명

기둥과 두공, 들보와 지붕이 오래된 흔적을 보여준다. 천상에 있는 궁궐과 황궁을 말하는 금궐운궁(金阙云宫)이다. 하늘에 있으니 상상만으로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짐작조차 힘들다. 도덕경(도가의 언설을 모은 책)을 읽으면 깨달을까? 아닐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르면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전각이 때로는 더 화사해 보일 때가 있다. 모든 신 중 으뜸인 옥황대제를 봉공하는 옥황전이다.

허우거우고촌의 관제묘. ⓒ최종명

관제묘는 어디에나 감초처럼 등장한다. 하늘에 올라간 관우는 재신이다. 비를 관장하는 우신(雨神)으로 신봉하기도 한다. 이름이 비슷하니 그리 믿어도 옥황상제가 탓할 리 없다. 배수를 훌륭하게 해결하고 관우에게 빌며 살아왔다. 악마를 물리치고 재난을 방지하는 영웅이라는 속마음도 있다. 충의천추(忠义千秋) 편액으로 겉치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황제부터 상인과 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좋아하는 관우지만, 바라는 바가 서로 다르니 인지상정이다. 중국인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새겨야 한다.

허우거우고촌의 관음당. 삼합원 구조다. ⓒ최종명

자항보도(慈航普渡) 편액이 걸린 관음당이 있다.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게 한다’는 뜻은 곧 관음보살의 무한한 사랑이다. 다섯 칸 너비의 대전에 관음보살과 함께 왼쪽에 아들을 점지해주는 송자낭랑(送子娘娘), 오른쪽에 재신인 조공명(赵公明)이 봉공돼 있다. 마당 양쪽에는 두 개의 이방(耳殿)이 있어 삼합원 구조다. 오른쪽으로 위태보살의 위태전이 있다. 부처의 열반 후 사리를 훔쳐 달아난 도둑을 잡은 호법 장군이다. 왼쪽에는 대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가 세 나라로 나눠질 때 위츠 지방을 영지로 둔 조양자의 사당이다.

허우거우고촌 관음당 마당의 탑. ⓒ최종명

향로 앞에 2m가량의 탑이 있다. 위로 갈수록 미세하게 좁아진다. 가운데에는 전각 속에 부처와 보살, 아래에는 가로 4줄 세로 6줄의 불감, 위에는 세로가 1줄 적은 불감을 두고 부처가 새겨져 있다. 4면이 똑같다. 천불 만불로 화려하게 꾸민 불감이나 전각을 많이 봤어도 처음 보는 모양이라 사방을 돌며 보고 또 봤다.

허우거우고촌의 오도묘. ⓒ최종명

화북 지방에 널리 퍼진 민간신앙인 오도묘(五道庙)도 있다. 오악 중 태산 신령인 동악대제(东岳大帝)의 수하인 오도장군이 앉아 있다.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명신(冥神)으로 알려져 있다. 저승의 행복을 쥐고 있어 민간에서 명복을 비는 대상이 됐다. 자그마한 감실이어도 마을 사람에게는 종이나 향을 피우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허우거우고촌의 사합원. ⓒ최종명


허우거우고촌 장가사당의 요동. ⓒ최종명


허우거우고촌 장가사당의 요동에 있는 신위. ⓒ최종명

마을 전체는 전통가옥인 사합원(四合院)과 자연을 이용한 요동(窑洞)이 결합한 주거 형태를 지녔다. 약 500년 전 17대 선조인 장준굉이 처음으로 사합원을 건축했다. 당시 위츠 일대 최고의 거상이었다. 노새를 잃어버려 밤을 새워 쫓아갔는데도 가문의 영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니 대단한 재력가였다. 장가사당의 문이 열려 있다. 사합원을 지나서 뒤로 가니 동굴로 만든 요동이 나온다. 아치 모양의 문을 여니 선대의 초상과 신위가 동굴 속에서 등장한다.

허우거우고촌의 토지감. ⓒ최종명

사당을 나오다가 야릇하게 생긴 감실에 한참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집마다 대문 안 담장에 하나씩 붙어 있다. 생김새도 서로 다르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누각처럼 만들어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탑이 안으로 쏙 들어가 있기도 하다. 화북 지방에서 가끔 보긴 했어도 이렇게 많은 경우는 없었다. 바로 토지신을 봉공하는 토지감(土地龛)이다. 농경 생활에 목숨을 건 지방에 많이 퍼진 신앙이다. 문을 출입할 때도 마음가짐을 겸허하게 매만지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도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으면 향을 피우거나 글씨를 써서 소망을 붙인다. ‘사람이 근면해야 토지가 풍성하다’는 인근지풍(人勤地丰)이라 많이 쓴다. 그래서인지 작은 전구로 불까지 밝힐 태세다. 물화천보(物华天宝), 인걸지령(人杰地灵)이라 쓴 대련이 보인다. ‘하늘에서 내린 자연의 보물’이며 ‘걸출한 인물이 나야 살기 좋은 땅이 된다’는 말로 당나라 초기 문학가 왕발의 말이다. 하늘도 땅도 굽어살펴 주길 바랐다. 천지감이라고도 부른다.

허우거우고촌 객잔이자 식당. ⓒ최종명


허우거우고촌 객잔의 요동. ⓒ최종명

마을 이름을 상표로 만든 술도 있다고 한다. 허기 때문이라도 서둘러 객잔이자 식당으로 들어간다. 사합원과 요동을 객실로 개조해 생각보다 깔끔하다. 화장실이나 샤워를 하려면 사합원에서 묵으면 된다. 불편을 감수하고 동굴 숙박 체험을 해도 좋다. 깊은 산골 공동체 마을은 가능한 자급자족을 한다. 오곡을 빻고 두부와 술을 만들고 채소와 과일은 길러 먹는다. 양도 기른다. 덕분에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풍성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허우거우고촌 상표의 백주. ⓒ최종명


허우거우고촌 객잔의 조밥과 반찬. ⓒ최종명

주인 아주머니가 조로 만든 밥을 먹어보라 한다. 노랗게 익은 색깔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두부와 달걀, 채소를 밥에 올리니 먹음직스럽게 푸짐하다. 무엇보다 동네방네 뛰어노는 닭이 낳은 계란 맛이 기가 막힌다. 굳이 기억을 소환해 보자면 대략 30년도 더 지난 맛이라고나 할까? 허우거우고촌에서 직접 전통 방식으로 양조한 고주(古酒) 한 병은 소주의 반값이다. 향긋하고 짜릿하며 술술 넘어간다.

허우거우고촌의 옛날 무대인 고희대. ⓒ최종명

멀리 황토로 가득한 능선이 점점 붉어지는 듯하다. 오후 햇볕이 서산을 넘어가기 때문인지 술기운인지 모르겠다. 겉치레 없는 담백한 산골이다. 그다지 뜯어고치지 않아 왕성했던 그 옛날 마을을 상상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입구가 곧 출구다. 고희대(古戏台)로 시선이 간다. 한 학생이 도화지 위에 마을을 그리고 있다. 풍광인지 역사인지 모르나 자기만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으리라. 무대에서 공연이 열리면 환호성을 지르며 울고 웃던 마을 사람처럼 가슴이 뜨겁다. 술기운만은 아니다. 인적 드문 산골에서 보낸 시간이 마냥 좋다.

쑨원·장제스와 얽힌 공자 후손 쿵샹시의 고거

타이구의 쿵샹시고거인 공가대원. ⓒ최종명

위츠에서 버스를 타고 서남쪽으로 1시간 30분 가면 타이구(太谷)다. 큰길에서 내린 후 골목으로 500m를 걸으면 공가대원(孔家大院)이 나타난다. 공자의 75대손 쿵샹시(孔祥熙)가 살던 저택이다. 대략 청나라 중기인 건륭제 시대에 건축됐다. 장제스와 친인척이 돼 국민당 정부 요직에 등용된 후인 1930년에 지역 유지인 멍광위로부터 매입했다. 그러나 쿵샹시는 공가대원의 주인 자격이 없다. 여기서 몇 년 살지도 않았고, 진상이었으나 말로는 좋지 않았다.

타이구 쿵샹시고거의 정원. ⓒ최종명


타이구 쿵샹시고거의 공자 조각상. ⓒ최종명

진중 지역의 사합원 저택은 비슷하다. 대문에서 들어선 후(1진) 접대를 위한 건물을 지나 다시 들어오면(2진) 정원과 곁채인 양쪽 상방이 드러난다. 온통 전시실이다. 유교 전통을 지키는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목조가 화려한 탁자와 불상, 도자기 사이에 복(福) 자를 새긴 공자 조각상이 보인다.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상인을 유상(儒商)이라 한다. 장사에 성공하고 인덕을 베푸는 상인을 말한다. 과연 그는 공자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을까?

타이구 쿵샹시고거의 삼진원. ⓒ최종명

다시 안으로 들어서면(3진) 2층 규모의 삼진원(三进院)이다. 원형과 방형 모양이 어울리고 노란색 테두리를 칠한 창문이 독특하다. 부드러움과 강직함을 조화롭게 꾸민 모양새다. 쿵샹시는 미국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1908년 한위메이와 결혼한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1912년에 석유 사업을 시작해 지역 거상으로 성장한다. 본처가 병사하자 갑자기 일본으로 간다. 삼민주의를 신봉했던 그는 일본으로 도피한 쑨원의 혁명 사업에 동참한다. 이때 쑹아이링과 만나 부부가 된다. 쑨원과 장제스의 ‘마지막’ 부인인 쑹칭링과 쑹메이링의 언니다. 당시 쑹아이링은 쑨원의 비서였다. 결혼 후 동생인 쑹칭링에게 비서 자리를 넘겼다. 쑨원과 인연을 중개한 셈이었다.

타이구 쿵샹시고거. 쿵의 둘째 딸 거처의 창문. ⓒ최종명


타이구 쿵샹시고거. 쿵의 둘째 딸 거처. ⓒ최종명

1915년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와 교육에 힘썼다. 산시성의 군벌 옌시산과 인연을 맺어 공직에 나섰다. 가뭄이 들자 100만달러를 기부해 구휼에 나섰고 실업 구제를 위해 도로 건설사업을 진행해 명성을 쌓았다. 어릴 때부터 논어를 읽은 유상의 면모였다. 이 시기에 2남 2녀가 태어났다. 2층은 두 딸의 거처인 수루(绣楼)다. 남정네가 함부로 드나들기 힘든 공간이었으나 세월이 지났다. 무엇보다 은밀한 냄새가 없다. 온갖 사진과 글자가 난무할 뿐이다.

타이구 쿵샹시고거의 서화원 입구에 장제스 부부의 방문 기념사진이 있다. ⓒ최종명

서쪽과 동쪽으로 문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진(进)과 비교해 과(跨)라 한다. 서과문을 지나면 서화원(西花园)이 있다. 1934년 11월 북방 순행을 마친 장제스 부부가 방문했다. 건물 앞에 당시 기념사진이 있다. 1997년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가 생각난다. 포스터부터 드라마였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으며,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고 했다. 세 자매의 애정관과 인생관이 곧 근대사였다. 쿵샹시의 돈은 과연 사랑할 가치가 있었을까?

타이구 쿵샹시고거 서화원의 밀랍. ⓒ최종명

1924년 쑨원이 주도한 광저우의 혁명정부에 참여해 재정청 청장을 맡았다. 군벌과 협상해 통일을 도모하려던 쑨원이 1925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1927년 왕징웨이가 세운 우한국민정부로 옮긴다. 그리고 곧 장제스의 난징국민당정부에 의탁한다.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 ‘장서방(장제스)’이 중국 최고의 실권자였다. 쿵샹시도 실업·재정·행정 책임자를 역임하고 화폐개혁과 중앙은행 창설 등을 맡아 2인자로 득세한다. 서화원에는 그가 장제스에게 선물을 증정하는 밀랍이 설치돼 있다.

덩샤오핑도 타이구 쿵샹시고거에 다녀갔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최종명

1948년에 덩샤오핑이 고거에 왔다. 국민당과 내전이 막바지에 치달을 때였다. 국민당은 백성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의 와중에 극심한 부패로 거덜이 날 지경이었다. 백성은 장쑹쿵천(蒋宋孔陈)으로 대표되는 4대 가문을 국두(国蠹), 즉 ‘나라의 좀’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공자 후손 쿵샹시 가문도 당당하게 벌레가 됐다. 1947년 쿵샹시는 미국으로 도주했다.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을 제외한 쑹씨와 장씨 일족 모두 타이완으로 내뺐다.

타이구의 고루 거리.ⓒ최종명

고거에서 나와 타이구 중심인 고루(鼓楼)로 간다. 사통팔달 거리는 진상의 근거지였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인 1625년에 처음 건축된 고루는 2층 20m 높이에 삼중 처마의 자태를 뽐낸다. 아치 모양의 문으로 사람이나 차량이 왕래한다.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문마다 글자가 적혀 있다. 방향 대신에 부르면 좋을 듯싶다. 한국은 ‘동서남북’ 순이지만, 중국은 ‘동남서북’ 순서로 부른다.

타이구의 고루. 동쪽 관상과 남쪽 의봉. ⓒ최종명


타이구의 고루. 서쪽 조분과 북쪽 공진. ⓒ최종명

동쪽은 관상(观象), 주역에서 길흉을 판단하는 괘효(卦爻)를 관찰한다는 말이다. 남쪽은 의봉(仪凤)으로 길조인 봉황의 별칭이다. 동쪽과 남쪽에서는 주로 시선을 위로 봤다. 편액이 층마다 걸려 있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아래로 시선을 두면 서쪽으로 조분(眺汾)이다. 서쪽 도시인 펀양(汾阳)이나 산시를 흐르는 펀수이(汾水)를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서쪽에서 오는 적이 늘 위험했다. 북쪽은 공진(拱辰)인데 별자리인 북극성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변경 지대를 지켜 군왕에게 충성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사방팔방 발품을 떠나는 발길은 어디로 내디뎌야 하나?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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