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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닮은 얼굴 하나…오백나한은 떠나고 발굴자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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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닮은 얼굴 하나…오백나한은 떠나고 발굴자는 남았다

입력
2021.03.09 17:00
수정
2021.03.09 18:34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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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창령사 터와 제천 송학산

“배수로를 파는데 걸려 나온 돌의 모양이 아무래도 이상해요. 그래서 물에 씻어 보니까 영락없는 나한상이더라고요.” 창령사 터 오백나한상은 불심 깊은 부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 기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던 김병호(73)ㆍ강남순(68) 부부는 1999년 영월군 남면 깊고 깊은 장장골 골짜기를 찾았다. 백두대간 초로봉(570m) 북쪽 경사면 해발 약 400m 지점이었다. 산줄기가 표주박처럼 감싸고 있는 터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아늑했다.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산중이었지만 마음이 끌린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후 부인 강씨의 꿈에 나한상이 보였고, 20여일 후 다시 찾아왔을 때는 김씨 자신이 하얀 소복을 입은 산신 할머니를 목격했다고 했다.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니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어쨌든 부부는 곧바로 땅을 사고 길을 낸 후 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불당 공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땅을 파던 중 나온 돌이 오백나한상이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김씨는 나한상을 임시로 비닐하우스에 옮긴 후 군청에 알렸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진행해 316점의 나한상과 기와ㆍ도기 파편은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곳이 창령사 절터라는 것도 기와 파편에 남은 문자로 확인됐다.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중 '보주를 든 나한'.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중 '보주를 든 나한'.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오백나한은 석가모니의 교리를 모으기 위해 뭉친, 더 이상 배울 만한 법도가 없는 경지에 이른 부처를 이른다. 희로애락을 초월한 듯한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어려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오백나한은 얼굴 표정과 몸동작이 모두 다르다. 그 은근한 미소를 들여다보면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전국 순회 전시 때마다 주목 받는 이유다. 현재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제 빈터만 남았으려니 생각하고 찾아간 절터에는 버젓이 ‘대웅전’ 간판을 단 작은 전각이 하나 있었다. 법당 안에는 17기의 나한상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두 박물관으로 옮긴 줄 알았는데 의외다. 오백나한상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작품을 똑같은 모양으로 제작한 복제품이다. 진품이 지닌 기운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창령사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김씨는 “마음 같아서는 법당을 크게 짓고 오백나한을 전부 모시고 싶었지만, 문화재이니 내 욕심만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법당도 문헌에 나온 대로 9평으로 소박하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월 남면 창령사 터 대웅전에 모셔진 나한상. 진품은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복제품이 불당을 지키고 있다. 최초 발굴자인 김병호씨는 자신에겐 진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영월 남면 창령사 터 대웅전에 모셔진 나한상. 진품은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복제품이 불당을 지키고 있다. 최초 발굴자인 김병호씨는 자신에겐 진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창령사 터에서 오백나한상을 처을 발견한 김병호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옛 절터에는 아담한 크기의 법당이 하나 세워져 있다.

창령사 터에서 오백나한상을 처을 발견한 김병호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옛 절터에는 아담한 크기의 법당이 하나 세워져 있다.


영월 남면 창령사 터 대웅전에 모셔진 나한상. 진품은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복제품이 불당을 지키고 있다. 크기와 모양은 진품과 같다.

영월 남면 창령사 터 대웅전에 모셔진 나한상. 진품은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복제품이 불당을 지키고 있다. 크기와 모양은 진품과 같다.


그래도 최초 발굴자로서 소망이 있다면 오백나한상만큼 절터도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월군 남면 창원리 1075번지, 도로명 주소는 담터길 256번지다. 창령사 터로 가는 길은 여전히 불편하다. 포장도로가 나 있지만 길이 좁아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때로 후진도 각오해야 한다. 별도의 주차장이 없어 김씨 집 마당이나 인근 도로변에 차를 세워야 한다.

대웅전 바로 뒤편 능선에 오르면 멀리 제천 송학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창령사 오백나한상은 송학산의 화강암으로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산자락 곳곳에 화강암을 캐낸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819m) 바로 아래까지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고 강천사라는 사찰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천천히 차를 몰아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면 발 아래로 산중에 자리 잡은 마을과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맞은편으로 제천 단양을 거쳐 소백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가 겹겹이 이어진다.

제천 송학산 정상 부근 강천사에서 송학면 마을과 들판,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진다.

제천 송학산 정상 부근 강천사에서 송학면 마을과 들판,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진다.


관란정 바로 아래로 서강의 물줄기가 크게 휘감아 돌아간다. 왼쪽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영월 한반도 지형이다.

관란정 바로 아래로 서강의 물줄기가 크게 휘감아 돌아간다. 왼쪽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영월 한반도 지형이다.

송학면 동쪽 끝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관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영월 청령포로 유배당하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가 단을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올린 자리다. 헌종 11년(1845) 후손과 유학자들이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에서 따 ‘관란정’이라 이름 지었다. 원호가 직접 기른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영월로 흐르는 서강에 띄워 청령포에 닿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자 아래로 서강의 푸른 물이 크게 휘어 돌아간다. 바로 상류에 영월 한반도 지형이 위치하고 있다. 창령사 터와는 약 12km 떨어져 있다.

영월ㆍ제천=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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