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위해서였다고? 웃기지 마. 정말 환자를 위해서였다면 그런 글 싸지르기 전에 그 남자한테 여길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현석 작가의 단편소설 ‘그들의 정원을 남겨두었다’에서 의사 수연은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와, 10년 넘게 그와 함께했지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동성 연인의 사례를 SNS에 올린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금세 화제가 돼 정치권에서 생활동반자법 발의 논의로까지 이어진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동료 수연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정작 나 역시 레즈비언 의사인 수연의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을 문예지에 발표한 전력이 있다.
“삼십대 초반의 일개 봉직의”이자 “의사 중에서는 희귀한 등단작가”인 ‘나’는 소설을 쓴 이현석(37) 작가 본인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다.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그는 현재 지방의 한 의료원에서 근무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다. 최근 출간된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에는 산업재해와 환경성질환을 다루는 의사이자 예민하게 세상을 감각하는 작가로서 그의 두 가지 고민이 함께 녹아 있다.
책에 실린 총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의사라는 그의 직업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의료 종사자가 주인공이거나, 병원이 배경이거나, 하다 못해 병명이라도 등장한다. 지난달 22일 이 작가를 서교동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만났다. 의사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며 글을 쓰는 것이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전문직군의 글쓰기는 시장 논리에 따라 최소한의 제동 장치 없이 성행해온 측면이 있다”면서도 “안 쓰는 것으로 도덕적 책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미국의 경우 의료 에세이가 주류가 된 지 오래인 만큼 이에 대한 세부적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있어요. 법률 에세이, 심리 에세이도 그렇죠. 반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전문직군이 자신의 특권을 당연시하고, 권력관계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무심결에 편취하는 일이 있죠. 앞으로 관련 논의가 많이 이뤄져야 해요. 제게 익숙한 세계라 의학 지식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저 역시 직접 경험한 얘기는 쓰지 않아요. 소설 속 전문 분과를 저와 상관없는 곳으로 정한 것도 그래서죠."
소설에서 의료 현장은 온갖 사회 문제의 각축장이다. 갑작스러운 임신을 한 동생 앞에서 당황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낙태 금지의 윤리성에 대해 묻고('다른 세계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탈북민 출신 의사를 통해 전염병 대처 시스템을 고찰한다('부태복'). 그리고 교정시설의 가혹한 징벌 피해자이자 아동강간범의 사망원인을 조사하는 의사나('참'),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한가운데 있던 간호사처럼('너를 따라가면') 의료진은 이 사회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최전선의 인물들이다.
돈을 많이 벌거나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분과가 아닌 환경보건학이라는 전공을 택한 것 역시 이 같은 고민의 연장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과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나가사키 원폭 2세 환우인 김형률씨 평전인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읽었어요.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을 앓으면서도 전국을 돌며 원폭 피해자들의 실태를 알린 분이죠. 언젠가는 김형률씨와 공해병에 대해 긴 장편을 써보고 싶어요. 제게 글쓰기란, 세상을 세밀하게 알고 싶다는 열망이고, 문학이란 명징한 산문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의문문의 형태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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