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만 되면 잘 팔렸는데… 태극기부대 이후 매출 급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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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만 되면 잘 팔렸는데… 태극기부대 이후 매출 급감했죠"

입력
2021.02.28 10:00
수정
2021.02.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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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 전성기… 이후 내리막길
한때 3·1절이 최대 판매일… 이젠 옛말
기관 ·기업·개인이 수천개씩 사가기도
태극기부대 출현 후 게양하면 눈치 보여
중국산 공습에 휘청… 코로나가 결정타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태극기 소매상 한켠에 태극기가 쌓여 있다. 이승엽 기자

"거기 태극기 팔던 가게 없어진 지 몇년 됐어. 장사 안 된다고 방 빼버렸어."

26일 서울 종로구 한 상가 건물. 백발의 경비원에게 5층에 있던 국기·깃발 판매업체가 왜 없어졌는지 묻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수차례 전화를 돌려 알아보니, 한때 태극기가 매출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 소매상은 현재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인쇄물·간판 제작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익명을 요구한 업체 사장은 "이제는 더 이상 태극기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3·1절이 코앞이지만 거리에서 태극기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태극기 부대' 출현 이후 오히려 태극기 수요가 급감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치며 국산 태극기 생산·판매 생태계는 고사 직전에 직면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도·소매상들도 코로나19로 모든 행사가 '올스톱'되면서 매출 급감으로 휘청이고 있다.

한국일보가 이날 서울 종로구 관수동과 창신동 등 태극기 도·소매상 10곳을 돌아본 결과, 최근 1년간 태극기 판매는 전년보다 절반 넘게 감소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각종 행사가 모두 취소되며 태극기 수요도 덩달아 감소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국산 태극기만을 취급해왔다는 소매상 A(51)씨는 "함께 일하던 직원들 모두 내보내고 지금은 가족끼리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다"며 "한때 태극기를 만드는 자부심으로 명절마다 집이랑 자동차에 내걸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서 그러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다른 태극기 판매업체 사장 B(58)씨는 "주변의 업체 2, 3곳은 최근 몇년 사이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2002년 월드컵이 호시절... '태극기부대' 이후 매출 급감"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가게 위에 오래돼 해진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승엽 기자

판매상들 말을 종합하면 불과 5년 전만 해도 1년 중 태극기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날은 3·1절과 광복절이었다. 이사하거나 태극기를 분실한 경우 3·1절에 태극기를 구매해 버리지 않고 5개월 뒤인 광복절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창신동에서 만난 깃발 전문제작업체 사장은 "예전엔 3·1절에 개인 구매 손님이 가장 많았다"고 말했다.

이들이 기억하는 태극기의 호시절은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이다. 23년째 태극기를 판매해온 한 업체 사장은 "당시엔 기관이나 업체뿐 아니라 개인이 수천개씩 손에 쥘 수 있는 태극기를 떼가서 경기장에서 판매할 정도였다"며 "행사도 많아 한 번 계약하면 1만개가 넘게 나갈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10년 넘게 태극기는 은행이나 주유소 등에서 판촉물로 사용되며 대량 판매가 이뤄졌다. 기관과 기업들 행사에선 적게는 수십장, 많게는 수천장씩 팔려나갔다.

하지만 '태극기부대' 시위가 한창이던 4년 전부터 태극기 판매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극우'의 상징으로 각인되면서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리기 시작했다. 정부 주관 대규모 행사에 쓰일 태극기를 구매하는 경우도 뚝 떨어졌다는 게 판매상들 이야기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직장인 김동원(32)씨는 "예전에는 국경일마다 부모님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했는데, 이제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질까 봐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41)씨도 "최근 2, 3년은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아달라는 아파트 안내 방송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전했다.

중국산 태극기에 설 곳 없는 국산 태극기

3·1절을 앞두고 26일 오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은 군장병들이 태극기광장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뉴스1

여기에 단가가 낮은 중국산 태극기가 대거 국내로 유입되면서 업계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1995년부터 국산 태극기와 함께 각종 휘장을 판매해온 업체 사장은 "보수집회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다니지만, 매출에 도움을 준 건 전혀 없다"며 "이 사람들은 재질 불명의 500원짜리 중국산 태극기를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은 국산 태극기 제조업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수요가 감소하는데 가격경쟁까지 밀리자, 현재 태극기를 대량 생산해 도·소매상에 넘기는 공장은 부산과 대전에 한 곳씩 남아 있을 뿐이다. 30년 넘게 태극기를 제조하던 업체 사장은 "한창때는 직원이 15명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래진 대한민국국기홍보중앙회 회장은 "순수하게 태극기가 좋아서 제작하거나 연구하던 사람도 이제는 '보수'로 낙인 찍혀 버리고, 코로나19 탓에 각종 행사조차 사라졌다"며 "정부와 깨어 있는 시민들이 합심해 국내 태극기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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