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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마지막 책방골목 살리려 시집 낸 고등학생들

입력
2021.02.20 18: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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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주여고 학생들, 보수동 책방골목 살리기 나서
시민들 시 모아 시집 내고, 홍보용 단편영화 만들기도

보수동 책방골목 6분 46초짜리 영화. 유튜브 캡처

보수동 책방골목 6분 46초짜리 영화. 유튜브 캡처


여기 전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헌책방골목이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노천에 학교들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이 헌책을 사고 팔면서 형성된 이곳, 바로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골목입니다.

이 골목은 크지도 않습니다. 길이로 치면 321m에 불과합니다. 지난 여름, 이 책방골목 한 건물의 책방 8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았습니다. 2곳은 자리를 옮겼지만, 6곳은 아예 영업을 포기했습니다. 책방이 세든 건물을 매입한 건설업체가 지상 18층 규모의 오피스텔을 짓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100곳 넘는 서점이 둥지를 틀고 있던 보수동 책방골목의 역사를 이어가는 가게는 30곳이 조금 넘는데요. 책방골목을 상징하는 입구에 자리 잡은 가게가 잇따라 문을 닫으며 인근 책방까지 도미노 폐업으로 이어질 처지입니다.

지난해 8월에는 10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축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축제는 전국 유일의 헌책방 밀집지인 보수동 책방골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3년부터 매년 열렸는데 말이죠.

이런 책방골목을 살리기 위해 두 팔 걷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부산 동주여고 2학년 학생들입니다. 한국일보가 동주여고 2학년 임지나양으로부터 '어게인 책방골목'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시집과 단편영화로 책방골목을 알리자

부산 동주여고 학생들이 책방골목 시집 제목을 설문조사로 추천받고 있다. 김성일 교사 제공

부산 동주여고 학생들이 책방골목 시집 제목을 설문조사로 추천받고 있다. 김성일 교사 제공

임양을 비롯한 동주여고 학생들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주제로 쓴 시 200여 편을 묶어 시집 '와보시집'을 냈습니다. 또 '영원히 간직하고픈…너의 이름은'이라는 6분 46초짜리 단편영화도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지난해 6월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됐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정작 학교를 간 것은 6월이 처음이었는데요.

담임 선생님이자 국어 선생님인 김성일 교사가 임양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면서 "동아리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애초 김 교사가 보수동 책방골목을 되살릴 방법을 고민하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보수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에 신청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코로나19 등으로 유례없는 위기를 겪는 골목을 학생들과 함께 알려보고 싶어서 신청하게 됐다"고 말했는데요.

김 교사는 "보수동 인근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서 태어나 쭉 살고 있는 토박이인데 고등학교 때 학교를 오갈 때마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다녔다"며 "부산시민 누구나 그렇듯이 학창시절 문제집이나 소설책을 사고 팔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그동안 서구와 중구 일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원도심과 도시재생에 관심을 갖게 돼 원도심의 찻집들을 돌면서 부산의 차 문화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했다"며 "그러다 지난해 보수동 마을 도시재생사업 소식을 접하면서 학생들과 독서 교육 차원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임양에게도 보수동 책방골목은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책방골목 주변에 살아서 종종 책을 사러 가기도 했고, 학교 현장체험 프로그램으로 서점들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이 제안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흔쾌히 하겠다고 나섰다는데요.

그렇게 모인 동주여고 학생 7명. 임양을 비롯해 김연경, 김예진, 박민주, 박혜원, 황희경, 허다교양입니다.

임양은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을 직접 만나기가 어려웠다"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책방골목의 어려운 상황을 사람들한테 좀더 잘 알릴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았다"고 했는데요.

하상욱 시인 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며 시 짓기를 통해 관심을 끌어 보기로 했습니다. 또 책방골목이니까 문학을 통해 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뜻을 모았다고 해요.

박기량 치어리더, 최대호 시인 등도 시집에 참여

동주여고 학생들이 '와보시집'에 들어갈 시를 쓰고 있다. 김성일 교사 제공

동주여고 학생들이 '와보시집'에 들어갈 시를 쓰고 있다. 김성일 교사 제공

임양을 비롯한 7명의 학생들은 자율학습시간 동안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골목이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데 하루만 시를 써달라"면서 홍보를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온라인을 통해 부산 시민들도 적극 참여했다고 해요.

특히 부산 출신인 유명 치어리더 박기량씨와 '읽어보시집', '평범히 살고 싶어 열심히 살고 있다' 등을 내면서 'SNS 시인'으로 유명한 최대호 시인도 참여했습니다. 지난해 9월 최 시인은 "학생들이 기특하다"며 직접 학교에 와서 시 짓기 강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생들과 시민들이 쓴 시 200여 편을 모은 뒤 임양을 포함한 학생들이 직접 손으로 써서 12월에 '와보시집'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김 교사는 "최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손 글씨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며 "손 글씨를 통해 종이책의 감성도 살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최대호 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시. 인스타그램 캡처

최대호 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시. 인스타그램 캡처

학교 인근 남포동 근처 남포문고에서 흔쾌히 판매를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1차 판매를 시작, 첫 판매분인 20권이 다 팔렸고요. 부산 공공도서관 60여 곳에도 내놓고 기부금을 모아 보수동 어린이도서관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김 교사는 "도시재생 활동이 마을에 직접적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책방골목 내에서 가장 공익적인 곳인 어린이도서관에 기부하자고 해서 정했다"고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총 수익은 60~70만원이라고 합니다.

이미 지금까지 1차로 50만원을 기부했고, 26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갤러리터16에서 진행될 전시회 수익금을 모아 2차 기부를 한다고 합니다. 2차 기부는 책방골목 내 서점에서 헌책을 구입한 뒤 기부한다고 하네요.

처음부터 프로젝트의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서포터즈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된 동아리 활동이었는데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점점 큰 프로젝트가 됐고, 보수동 도시재생센터에서 시민들이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고 다시 책방골목으로 돌아오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어게인 책방골목'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주셨다고 해요.

이후 시집을 어떻게 홍보할까 생각하다가 나온 아이디어가 단편영화였다고 하는데요. 단편영화의 경우는 재미를 위해 사랑 얘기를 넣었다고 합니다.

임양은 "학교의 연기 준비를 하는 (선배) 언니들이 촬영에 응해줬다"며 "책방 직원 오빠와 사랑에 빠지는 고등학생 연기를 해줬다"고 전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배우 이동하씨가 연기했고, 주인공과 그 친구들로는 이 학교 3학년 김현지·양지혜·양혜진·박주현양이 출연했습니다.

감독과 배우 모두 재능기부였다고 하네요. 부산광역시와 문화체육관광부 공식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도시재생 통해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시집 '와보시집'을 제작한 부산 동주여고 학생들. 김성일 교사 제공

시집 '와보시집'을 제작한 부산 동주여고 학생들. 김성일 교사 제공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까지 임양은 '도시재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도시재생을 통해 관광지로 거듭난 곳이 많다"며 "보수동 책방골목도 책 구매 등 많이 이용해줘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임양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물었어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미래유산으로도 지정이 됐어요. 한국에 남은 마지막 책방골목인데 없어진다고 하니 더더욱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임양은 여행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그는 "시 주제를 주면 그걸로 글을 쓰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며 "실제로 초등학생 때부터 그 앱을 이용해서 시를 많이 썼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사는 "책의 가치는 분명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어떻게 보수동 책방골목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갈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책방골목의 새로운 주인이 젊은 세대와 청소년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진행한 도시재생 활동이 책방골목에 새로운 활력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임양과 김 교사의 소망대로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 하면 떠오르는, 그래서 모두가 한번쯤 꼭 가보고 싶은 장소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손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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