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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들, 문으로 변신한 병풍 통과해 어좌 올라"...사료 최초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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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들, 문으로 변신한 병풍 통과해 어좌 올라"...사료 최초 발견

입력
2021.02.14 17:40
수정
2021.02.14 19:26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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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형태로 제작된 일월오봉도, 추측만 난무했는데...??
이강근 교수, 왕 정전 뒷문 이용 기록? 발견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가 지난달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봉도 뒤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교수가 발견한 사료에 따르면 조선 시대 왕은 이 교수가 서 있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오른 뒤 열어 놓은 일월오봉도를 통과해 어좌에 앉은 것으로 파악된다. 채지선 기자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가 지난달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봉도 뒤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교수가 발견한 사료에 따르면 조선 시대 왕은 이 교수가 서 있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오른 뒤 열어 놓은 일월오봉도를 통과해 어좌에 앉은 것으로 파악된다. 채지선 기자


“그림이 문처럼 열리고, 왕이 그 문을 지나 용상에 앉았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의 설명에 처음엔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이 교수와 함께 서울 덕수궁의 중화전을 찾았다. 왕이 앉던 어좌 뒤로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그려진 그림인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 왕이 있는 곳이면 궁궐 안이든 밖이든 늘 따라다닌다고 해 ‘왕의 그림’으로 불리는 그림이다.

일월오봉도.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을 비롯해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산봉우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다. 병풍 형태와 받침대에 끼워 세우는 가리개 형태의 삽병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월오봉도.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을 비롯해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산봉우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다. 병풍 형태와 받침대에 끼워 세우는 가리개 형태의 삽병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왕이 어좌에 오를 때 문처럼 열렸다는 그림이 바로 이 일월오봉도다. 문화재청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이 교수를 따라 일월오봉도 뒤편으로 갔다. 그림 뒤쪽에 문고리와 경첩(문짝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이 달려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 당기면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일월오봉도는 주로 병풍 형태로 제작되는데, 정전(왕이 나와 조회를 하던 공간)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중앙 부분이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어 들른 경복궁 근정전 내부의 일월오봉도도 마찬가지였다. 내부로 들어가 자세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멀리서 문짝의 형태로 만들어진 일월오봉도를 엿볼 수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 내부의 모습. 임금의 자리인 용상 뒤로 일월오봉도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경복궁 근정전 내부의 모습. 임금의 자리인 용상 뒤로 일월오봉도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어좌 뒤에 놓인 일월오봉도가 문의 형태로 제작됐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된 것인지에 대해선 추측만 있어 왔다. 2018년 12월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가 발행한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 보존처리 수리보고서’는 “일월오봉도 하단부 중앙에 있는 두 개의 틀은 여닫을 수 있게 두 개의 문으로 제작돼 있다"면서 "필요 시 사람이 출입하거나 물건을 옮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악도 보존처리 수리보고서에 나오는 일월오봉도 뒷면 구조.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의 형태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보고서 캡처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악도 보존처리 수리보고서에 나오는 일월오봉도 뒷면 구조.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의 형태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보고서 캡처


이 교수는 한발 더 나갔다. 그는 임금의 동선을 감안, 일월오봉도의 이 문이 단순히 물건을 옮길 때 사용된 게 아니라 왕이 드나드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강근 교수는 조선시대 왕이 정전을 출입할 때 뒷문을 이용했다는 기록을 최초로 발견, 실제로 왕이 문의 형태로 만들어진 일월오봉도를 통과해 어좌에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 교수가 찾아낸 1867년(고종 4년) 11월 16일 승정원일기를 보면, 가마를 탄 고종이 사정문에서 내린 후 걸어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으로 들어서고, 이때 근정전 후문을 지나 어좌에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정전에서 나올 때에도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후문으로 나왔고, 가마를 타고 대내(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돌아간 것이 기록돼 있다. 이 교수는 “궁궐 내에서의 왕의 움직임은 정치 행위라 왕의 동선 연구에 관심을 가져 왔다”며 “기록을 검토한 결과 왕이 후문을 통과해 계단을 오른 다음, 열린 일월오봉도를 지나 용상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조선의 왕이 정전의 후문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이뿐이 아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임금이 정전을 출입할 때 '정전의 후문(북문)'을 경유해 어좌에 오르고 내렸다는 사실은 △조회(창덕궁 인정전) △교서 반포후 진하(경복궁 근정전) △궁중잔치인 진연(경희궁 숭정전) 등의 사료로 확인된다.

어좌가 놓인 어탑(임금이 앉는 자리에 단을 높여 놓은 시설)의 뒷쪽 계단 너비가 가장 넓다는 점도 왕이 이 계단을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어탑에는 전후좌우로 계단이 있는데, 뒷쪽 계단의 너비는 다른 계단의 너비보다 넓다. 경복궁 근정전의 경우 어탑 뒷계단의 너비는 238.2㎝로, 앞계단(144.2㎝)이나 옆계단(90㎝)보다 넓다.

그렇다면 왕은 왜 굳이 정전의 뒷문을 이용해 문의 형태로 만들어진 그림을 통과해 어좌에 올랐을까. 이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침전, 편전, 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선 상 정전의 북문을 이용하면 최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데다, 거리가 짧으면 호위의 효율성도 높아지기 때문에 북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왕이 정전의 북문만 이용한 건 아니어서 북문 사용 이유에 대해선 좀 더 깊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추후 연구를 통해 어떤 때 왕이 정전의 뒷문을 이용해 어좌에 올랐는지가 밝혀진다면, 앞으로 왕이 등장하는 행사를 재현하는 자리나 왕이 나오는 역사 드라마에서도 이 같은 왕의 동선을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정전의 뒷문이 열리고, 그 문을 통과해 어탑 뒷계단을 올라, 문처럼 열린 일월오봉도를 지나 어좌에 앉는 왕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조만간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할 예정인 이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문화재 원형 회복을 기대하기도 했다. “창덕궁 인정전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변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정전은 정면에만 문이 있고, 뒷문(북문)이 아예 없어요. 정전의 용도가 사라지고 제대로 쓰이지 않게 되면서 그렇게 된 거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늘날에도 원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창덕궁 인정전이 원형을 회복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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