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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와서 웃고 가는 행복한 병원,   행복을 처방하는 행복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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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와서 웃고 가는 행복한 병원,   행복을 처방하는 행복한 의사"

입력
2021.02.0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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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 원장

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대구 수성구) 원장이 성장클리닉 상담 어린이와 생활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있다.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대구 수성구) 원장이 성장클리닉 상담 어린이와 생활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있다.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지켜주지 못한 환자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점검하지 않습니다. 저는 환자와 있을 때 모든 잡념이 사라집니다. 환자가 통증을 해결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저의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은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만성신경면역계질환으로 뇌, 척수, 시신경 통증 및 마비에 이르는 희귀질환이다. 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의원 원장은 전공의 1년차 시절에 중증 다발성경화증 환자를 만나 주치의를 맡았다. (2006년 4월부터 10월까지 환자를 돌봤다.) 조금이라도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그 병은 의학적 한계로 인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당시 그는 30대 초반으로 3년이 넘게 병상 생활을 하며 늘 누워 있는 환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화가 가능했다. 늦은 밤 병동에서 환자분이 잠을 못 잔다고 콜이 오면 달려갔다. 처음에는 배운 대로 수면제를 처방했지만 약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날 있었던 환자의 이야기를 15분 정도 듣다 보면 그 환자는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환자는 사이먼 앤 가펑클(1960년대 남성 포크 듀오)의 노래를 좋아했다. 김 원장은 MP3에 직접 곡을 담아와 환자가 잠 못 들 때 수면제 대신 들려주곤 했다. 우리나라에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로 알려진 노래의 가사처럼 마음만이라도 환자가 고통으로 가득찬 험한 세상에서 다리를 건너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싶었다. 때론 머리맡에서 못 부르는 노래지만 라이브로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그해 추석이었다. 대전에서 수련 중이던 김 원장은 이틀간 휴가를 받아서 경기도에 있는 집에 다니러 갔다. 돌아와서는 더 추워지기 전에 환자가 가을바람을 느끼며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도록 구급차 기사에게 부탁할 작정이었다. 예정된 병원 복귀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하기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가던 중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다”는 전화를 받았다. 도착하니 환자는 중환자실에 있었다. 뇌사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로 숨만 쉬고 있었다.

알고 보니 환자분의 어머니께서 추석 음식을 가져와 환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다가 기도가 막혀 질식한 것이었다. 이후 한 달 정도 김 씨는 일과의 절반을 이 환자를 돌보는데 사용했다.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싸우던 환자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는 상황이었다. 김 원장이 전공한 재활의학과는 삶과 죽음의 문턱을 지나온 환자가 오는 곳으로 죽음과 맞닥뜨리는 일은 드물었다. 처음 만난 환자의 죽음 앞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 원장은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자책했을 어머니를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환자의 언니에게 편지를 전해주며 “하늘로 올라가기 전 늘 환자분이 가보고 싶어 하던 그 산에 꼭 들렀다 가라”는 부탁과 함께 “무덤에 편지를 같이 묻어 달라”고 했다. 편지는 김 원장이 그 환자에게 주는 마지막 처방전이었다.

다음 해, 검사실에서 바쁜 중에 환자분의 어머니께서 까만 비닐봉지에 직접 짠 참기름 두 병을 싸가지고 오셨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주치의가 되어 보살피던 환자의 죽음의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김 원장은 인생사 생로병사라는 생의 한 단면을 보았다. 의술은 인술인지라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는 없지만 ‘치료의 한계를 만났을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섰다. 그날을 계기로 의사가 더 이상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라도 환자에게 ‘행복을 전하는 의사가 되자’고 결심했다. 그의 병원 이름이 행복한재활의학과인 이유이다. 그는 “지금 충분한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며 매일 환자를 만난다고 했다.

김 원장은 병원 출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일상이 환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몸이 힘들다고 삶이 힘든 것은 아니며, 체력이 되는 한 환자들 옆에서 그들을 지키고 치료하는 것이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 원장이 환자에게 쓴 손 편지(오른쪽)와 환자들이 호빵을 먹고 남겨둔 기금을 모아 취약 계층에게 전달하는 사랑의 호빵 찜기.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 원장이 환자에게 쓴 손 편지(오른쪽)와 환자들이 호빵을 먹고 남겨둔 기금을 모아 취약 계층에게 전달하는 사랑의 호빵 찜기.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김 원장은 2년 전부터 미혼모 시설(잉아터)에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아직 미혼모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김 원장은 미혼모는 본인 한 몸 건사하기도 빠듯한데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고,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지만 마음을 보태기 시작했다. 방법이 재미있다. 병원에 가면 호빵 찜기가 있다. 누구나 먹고 100원만 내면 된다. 무인 점빵이다. 호빵은 옛 추억을 상기시키며 환자의 긴장감과 무료함을 달래준다. 환자들은 100원도 내고 1,000원도 낸다. 돼지저금통이 꽉 차면 그날은 ‘돼지 잡는 날’이다. 저금통의 돈만큼 김 원장이 돈을 더 보태어 시설에 보낸다. 환자들이 낸 돈이니 환자들과 함께 공동 기부한 셈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는 청소년보호시설(늘사랑청소년센터)에 간식을 보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설 아이들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한 순간에 선을 넘어서 사회로부터 낙인이 찍히고, 아직 꽃망울을 터트려 보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사회가 기회를 주고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사회의 관심과 따뜻한 배려로 아이들 중에서 멘토가 나오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행복한재활의학과 직원들이 환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후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지난 크리스마스 때, 행복한재활의학과 직원들이 환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후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한재활의학과 제공


거꾸로 산 인생

김 원장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대 경영학과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계명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선경무역상사에서 입사했다. 대리 1년차의 눈에 본부 전무는 능력도 인품도 출중했고 그의 우상이었다. 김 원장은 항상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전무도 일찍 출근해서 30분 정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김 원장이 전무에게 물었다. “전무님은 참 행복하시죠? 아이들도 유학 보냈고 다 이루셨으니...” 전무는 “참 열심히 살았지. 그러나 다시 산다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라며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김 씨는 충격이었다. “저렇게 능력이 있는 분이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 후 같은 교회에서 만난 형과 1년간 자취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형은 능력으로는 전무와 비교도 안 되지만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젊은 시절 목사님을 만나 지금껏 살아 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늘 넉넉한 웃음과 나눔을 실천하며 행복하다고 했다.

아내가 의대편입을 권유했다. 문과계열에서 편입은 불가능했다. 그는 31살에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들과는 띠동갑(12살) 차이가 났다. 그때부터 김 원장은 의대공부가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이 분명하기에 공부가 쉽지는 않았지만 목표가 확실해졌다.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지금도 배우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공부해도 사람의 몸을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배움이 귀찮아지면 일을 그만 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의대 진학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첫째 아이가 의대 들어갈 때 태어났고, 분유 살 돈이 없어서 둘째 아이는 인턴 들어가서 낳았다. 고생을 시킨 ‘원죄’ 때문에 김 원장은 가정에 충실하다. 아이들과 요리 등의 취미 생활을 같이하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의 이름도 외우면서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병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인은 환자가 치료를 잘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동선을 잘 알려주는 것,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등이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환자가 조금 줄어든 것이 위험이 아니라,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역발상으로 대처하며, 그동안 바빠서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던 것을 점검하고 보충하는 데 무게를 두었다. 김 원장은 완벽하게 치료를 마치고 나면 환자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마무리한다. 그가 직접 쓴 손편지를 전해준다. 병원 직원들과는 2년 전부터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심리학이나 대화법 등 다양한 책을 읽으며 직원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 올해는 함께 경제 관련 서적을 읽고 경제적 시각을 넓히도록 도울 예정이다.

병원에는 점점 복합적인 증세를 가진 난치성 질환의 환자가 많이 온다. 50대 여자 환자는 어깨가 아파서 치료했는데 어깨가 다 나으니 또 다른 고민을 호소했다. 15년간 냄새를 못 맡는 만성축농증 환자였다. 환자는 5년 전 이비인후과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냄새 맡는 것은 단념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도 느끼기 어렵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머리로 가는 혈액의 흐름을 좋게 만드는 자율신경계 치료를 4~5개월간 진행했다. 어느 날 환자가 “냄새가 슬슬 맡아진다”고 했다. 그런데 “하수구가 냄새가 난다”고 했다. 김 원장은 어떤 냄새가 가장 맡고 싶은지를 물었다. 환자는 “커피냄새를 맡고 싶다”고 했다. 김 원장은 완전히 좋아지면 제일 좋은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직접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병원을 들어설 때 커피향이 나서 너무 기분이 좋다”며 기뻐했다. 김 원장은 최고급원두를 주문했다.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서다.

“꾸준히 치료를 받는 환자는 대단합니다. 상을 주고 싶습니다. 끝까지 저를 믿고 치료를 받아 줘서 행복합니다. 심근경색이나 협심증 환자가 재활치료를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은 생명연장이 8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협심증, 심근경색 치료를 받았더라도 재활치료는 꼭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치료하는 곳이 많이 없습니다. 심장재활과 다양한 만성질환, 암 환자재활을 통해 그들이 환자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써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 내도록 하는 종합재활병원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김 원장은 유튜브 행복한재활의학과 행복채널을 운영하며 통증, 성장, 측만증에 관한 정보와 재활홈트레이닝을 소개하고 있다. 구독자는 1,420명에 조회 수는 63,195회를 넘었다.

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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