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는데 한국영화는 반대였던 모양이다. 팬데믹의 수렁에 빠지기 직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며 잠시나마 취할 수 있었던 게 한국영화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던 걸까. 우리만의 일은 아니지만 코로나19로 무너진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암울하다. 1회 상영에 관객수가 10명도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극장이 집보다 안전하다’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2월부터 정부가 백신접종을 시작한다니 하반기부터는 영화산업도 어느 정도는 회복할 듯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얼만큼일지는 예측하는 사람마다 차이가 크다. 20년 넘게 영화계에 몸담아 온 A는 “백신이 나와도 1,000만 관객 영화가 다시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영화관 업체에서 일하는 B는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대체 불가하니 코로나19 문제만 없다면 관객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화산업을 괴롭히는 건 불확실성이다. 산업을 둘러싼 변수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영화관 관람 욕구가 얼마나 되살아날지가 의문이다. 온 국민이 백신을 맞는다고 코로나19가 남긴 집단 트라우마가 사라질까. 팬데믹 후유증으로 극장 가기를 꺼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이들의 발걸음을 어떻게 돌릴 것인가.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의 확대도 주요 변수다. 극장 개봉이 어려운 영화에 OTT가 비상구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영화관 독과점 형태로 시장을 키워온 주류 영화계로선 OTT가 관객을 빼앗아가는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눈 영화감독 C는 한국영화의 양극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할리우드만 봐도 요즘엔 넷플릭스가 더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 같다”며 “이러다간 앞으로 '어벤져스’처럼 대형 스크린에 어울리는 대작만 영화관에서 살아남게 될지 모른다”고 푸념했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선 작품성 높은 저예산 영화들이 속속 넷플릭스로 향하고 있다. 최근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2020년 최고의 영화’ 10편 중 4편이 넷플릭스 영화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영화는 극장 매출에 의존하는 비율이 2019년 기준 76.5%에 이른다. 그간 대작 영화들은 전국 상영관의 최대 80%를 독차지해 1, 2주 만에 1,000만 관객을 모으는 방식으로 영화투자배급사들을 먹여 살려 왔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에 각종 혜택을 주며 성장했듯 한국 영화산업도 승자 독식을 부추기며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100억원이 넘는 대작들은 물론 ‘기생충’이나 박찬욱의 ‘아가씨’, 이창동의 ‘버닝’ 같은 영화들도 모두 이 같은 토양에서 제작될 수 있었으니 무작정 비판할 사안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영화 호황의 토대였던 극장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무성영화 감독이 유성영화 제작자를 비판하고, 흑백영화 애호가가 컬러영화를 깎아 내리고, 필름으로 찍던 감독이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따라올 수 없다 했지만 결국 시대는 계속 바뀌었다. 멀티플레스 업체들도 상영관을 줄여가고 있다. 극장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극장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한국영화계가 근본적인 체질 개선 없이 독과점에 기대서만 살아남기는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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