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장마철이라 강이 불어서 발을 헛디뎠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는 물을 꼴딱꼴딱 먹거나 넘어지면 죽어요. 옷은 머리 위에 이고, 오징어, 마른 오징어 머리에 이고. 내가 오징어를 좋아하거든요. 중국에 나가면 오징어가 비싸다는 생각에 내가 오징어를 달라고 했지.”
탈북 여성 이수린(56)씨는 두만강을 건너 2004년 한국에 들어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씨가 기어코 챙긴 건 마른 오징어. 그 오징어는 '반드시 살겠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에 있는 딸과 남편을 만나겠다'는 생(生)을 향한 강력한 다짐이었다. 그녀는 한국 생활에서 힘들 때마다 마음 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야 된다’, ‘나는 반드시 꼭 한다’를 외친다고 한다. ‘있다’, ‘한다’ ‘해야 된다’ 이 말을 되새기며 그는 끝끝내 가족을 만났고, 보험 영업왕에도 올랐고, 딸은 승무원으로 키워냈다.
5명의 탈북 여성의 생애사를 기록한 인터뷰집 ‘절박한 삶’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단편 소설을 보는 듯 하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거나, 10년 넘게 이름을 바꿔가며 숨어 사는 혹독한 고생 끝에 한국에 도착한 북한의 ‘무서운 언니들'은 알고 보면, 저자에게 보험 판매를 권유하거나, 딸 아이를 주려고 저자의 크레파스를 탐내는 그냥 옆집 아는 '언니들'이었다.
저자들 역시 날 것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전거를 못 탄다고 놀리는 탈북 여성에게 얄미운 감정을 느끼거나, 탈북 여성들과 같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다가도 한국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갑자기 거리를 두기도 한다. 서로의 속내를 자주 들키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연구가 아니라 진짜 대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북민들은 특별한 타인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다.’ 이 교훈적인 문장의 의미를 책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생하게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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