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산다. 그들의 육신은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들이 남긴 빛나는 정신과 문장은 계속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10년 전 타계한 박완서 작가도 그렇게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됐다. 1970년 마흔 살에 데뷔해 2011년 1월 22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40년 남짓한 동안 그가 남긴 무수한 글은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곁을 언제까지고 지키고 있다.
22일 고 박완서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가족, 지인, 후배 문인 그리고 독자들에게 ‘당신 곁을 지키는 박완서의 문장’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 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산문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중
가을 어느 날 연탄광에 남아 있는 연탄의 개수를 셈하면서 연탄 걱정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 글이 이렇게 맺어가는 걸 보며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연탄으로부터 아담과 이브 같은 사랑을 떠올리다니,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호원숙(박완서 작가 장녀)
기다려주는 것도 결국은 슬픔을 나누는 한 방식이었어요. 사실 우리는 좋은 일은 함께 잘 나누는데 슬픔을 나누는 일엔 인색한 구석이 있어요. 어디서 사고가 터져도,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내 일이 아니면, 내 가족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지요. 더불어 나눈다는 것은 관심에서 출발해요. 많은 이웃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슬픔에 잠긴 사람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되는 것이고요.
샘터(2007) 박완서와 이해인의 ‘대화’ 중
작가의 작품속엔 선택하고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아 딱히 하나만 선택하기 힘들지만 ‘대화’라는 책에서 사랑과 슬픔과 위로에 대한 이야길 나누다가 내게 들려준 이 말씀이 깊이 다가온다. 예기치 않은 펜데믹시대를 사는 요즘,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는 관심과 위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함을 절감한다. 나만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난 넓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을 실어주는 행동적 위로의 ‘관심천사’가 되면 좋겠다.
이해인(수녀)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의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산문 ‘세상에 예쁜 것’ 중
스러져가는 지인의 병실에서 목격한 짧은 이야기 속에 생로병사가 들어있다. 병자를 위로하는 것은 세속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새싹처럼 몽실몽실 돋는 기운, 세상에 예쁜 아기의 발바닥이라는 것. 평범한 풍경을 돌연 비범한 통찰로 드러내는 박완서표 특유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은숙 (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불도저의 힘보다 망각의 힘이 더 무섭다.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중
박완서 선생님은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해 1월에 돌아가셨다. 소설가가 되면 뵐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터라 놀라고 슬펐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을 뵙고 싶었던 건 소설가란 무엇인지, 여성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건 또 어떤 의미인지를 여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품었던 질문의 답을 육성으로 들을 기회는 더 이상 없지만 선생님의 이 문장을 나는 소설가가 된 이후 종종 떠올린다. 작가의 유일한 책무란 어쩌면 망각에 저항하는 일. 나는 그 막중한 책임을, 개인의 기억을 통해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신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백수린 (소설가)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소설 ‘나목’ 중
우리는 두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본다. 최근 예상치 못한 힘든 시기를 겪으며 회색빛 일상을 마주했다. 한국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작가님의 이야기들은 공감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작가님의 책들을 읽으며 암흑같았던 그 시절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더불어 우리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은 나를 더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어주신 박완서님을 이렇게 추억해본다.
김내정(42, 주부)
성남 댁은 비로소 자기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가담해서 진행시키고 있는 교묘한 음모를 감지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 이 집안을 드높은 기성과 지독한 똥 구린내로 가득 채우고 거침없이 지배하던 영감님을 흔적도 없이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
소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중
소설 속 인물들이 다양한 추악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구절에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보다, 물질의 존엄을 중요시한다. 박완서 작가는 물질과 비물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을 소설 속으로 끌어온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설은 아프면서도 고혹적이다.
하건욱(34, 퍼스널 트레이너)
독서가 내가 빌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였다면 새로운 독서의 체험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 바로 보게 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책을 읽다 보면 작가마다 마음으로 느껴지는 글맛이 있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그 속에서 우리가 꼭 지니고 가야 할 인간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 따뜻한 글밥의 향기도 작가의 오래된 독서 습관이 글에 찬란히 녹아 내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정미(42, 독서지도사)
더 신나는 건 처음으로 내 차를 소유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마구 휘둘리고 끌려다녀야 하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우리 힘에 순종하는 우리의 소유물이었다. 소유한 이상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완만해 보였지만 힘이 부쳐 숨이 턱에 닿으니까 높은 봉우리를 오르는 것처럼 급박해졌다. 정상에만 올라봐라 이놈의 차를 낭떠러지 밑으로 굴려버리리라. 그리고 훨훨 자유로워지리라. 오로지 그 희망에 우리는 이십대의 젊은 날처럼 싱그럽게 용솟음치는 힘으로 차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소설 ‘저문 날의 삽화’ 중
작가는 항상 느리지만 부단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정감 어린 시선과 갈채를 보내왔다. 이 대목은 그러한 노인들에 대한 박완서 특유의 따뜻함이 짙게 배어 있다. 저무는 노년의 고귀한 삶의 의지를 한 폭의 삽화(揷?)처럼 그려낸 것이다.
김용범(24, 대학원생)
어머니의 손이 사방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붕대 감긴 자기의 다리에 손이 닿자 날카롭게 속삭였다. "가엾은 내 새끼 여기 있었구나. 꼼짝 말아. 다 내가 당할 테니." 어머니의 떨리는 손이 다리를 감싸는 시늉을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다리는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온몸으로 그 다리를 엄호하면서 어머니의 적을 노려보았다.
소설 ‘엄마의 말뚝’ 중
위 구절은 비록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지만, 아들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어머니의 의지와 사랑을 잘 드러낸다. 작가는 ‘엄마’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감성을 그 어떤 작가보다 따뜻이 그려낸다.
유동근(24,대학생)
노지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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