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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이미지에 가린 서정성

입력
2021.01.1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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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시인 이육사

23세 청년 이육사는 대구 형무소에서 자신의 수인번호를 읊조릴 때부터 이미 시인이었다. 위키피디아.

23세 청년 이육사는 대구 형무소에서 자신의 수인번호를 읊조릴 때부터 이미 시인이었다. 위키피디아.


1927년 11월, 수인 번호 '264'를 달고 대구형무소 추운 감방에 갇혀 있었을 당시의 이육사는 시를 발표하기 전, 그러니까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뒤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무렵이었다. 32세 청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테러 직후 경찰은 지역 요주의 인물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며 이육사의 네 형제도 끌고 갔다. 만 23세의 시인은 광복단원으로서 만주, 러시아를 누비던 동향 선배 장진홍을, 최소한 이름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 31개월 미결수로 갇혀 수시로 고문당하면서 이육사는 장진홍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겹쳐 보고, 수없이 불리었을 수인번호도 나직이 소리 내어 되뇌기도 했을 것이다. '264....' 시인의 언어적 감성에 그 소리의 질감이 썩 탐탁했던 모양이다. 언뜻 들어서는, 숫자(수인번호)라는 느낌도 없어 '나 이런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는 듯한 치기(稚氣)를 가릴 수 있고, 운율도 은근히 다부져서 운명의 좌대로 쓸 만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는 출옥 이듬해인 1930년 10월 '별건곤'이란 잡지에 수난기 지역 사회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모색한 글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발표하면서 '이활(大邱二六四)'이란 필명을 처음 썼다. 앞서 그는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자신의 첫 시 '말'을 발표하며 1926년부터 써온 '이활(李活)'이란 필명을 썼다. "(...)서리에 번적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 그는 한자를 세 차례 바꿔 1932년 무렵부터 '육사(陸史)'라는 필명을 썼고, 동생이 1946년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발행하며 저 이름으로 굳어졌다.

남아 있는 그의 시는 한시 3편을 포함해 모두 40편. 투사적 이미지가 강하고 '광야'나 '절정'같은 힘찬 시들이 또 절창이어서, '청포도'같은 서정시가 오히려 예외로 여겨지지만, 그의 시들은 오히려 토속적이고 감각적이고 따사로이 해학적인 것들이 더 많다. "표모(漂母)의 방망이 소린 왜 저리 모날가요/ 쨍쨍한 이 볕살에 누더기만 빨기는 짜증이 난 게죠"( '춘수삼제(春愁三題)', 35.6) 육사 이원록이 1944년 1월 16일 옥사했다. 향년 39세.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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