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커튼콜 [명사].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배우들이 나오는 것.
연극 '삼류배우'에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묻는다. 왜 아버지랑 결혼하게 되었냐고. 어머니가 답한다. 연극을 보러 갔었는데 한 배우가 커튼콜 때 그 누구보다 더 깊게, 더 오랫동안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그 순간 그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커튼콜은 배우와 관객이 서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다.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의 가장 밝은 순간이다. 무대와 객석이 서로에게 마음을 보내는 짧으면서 소중한 시간. 그리하여 커튼콜은 공연보다 더 깊게, 더 오랫동안 고민을 한다.
배역의 상태로 인사할 것인지, 배우로 돌아와 인사할 것인지, 배역의 상태에 머문다면 이야기의 결말에 머물 것인지, 결말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지. 인물들의 관계는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사랑할 수 없었던 이들이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들이 화해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떤 순서로 등장하고, 인사하며, 퇴장할 것인지. 인사를 할 때 배우의 감정은 공연의 감정과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배우 각자의 감정을 느껴도 되는 것인지. 배우가 모두 퇴장한 후의 객석은 곧바로 조명이 켜질 것인지, 아니면 잠시 동안의 어둠과 음악 속에서 여운을 줄 것인지.
나는 커튼콜을 상상할 때 배우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이야기의 모든 순간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무대에 등장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인사를 하고 싶은지 묻는다. 무대에서 겪는 모든 감정을 다 거쳐보지 않고는 그 마음과 인사를 찾기가 힘들다. 극장의 기운과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그 마음과 인사도 달라진다. 그래서 커튼콜은 대부분 공연이 오르기 직전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무수한 시간을 연습하고 생각하고 논쟁하며, 결국 마지막 순간에 도달한 배우들과 만들어내는 커튼콜. 그 짧은 찰나의 인사를 볼 때마다, 그 길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흐르며, 늘 울컥해진다.
악수를 하면 관계가 생기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사람과는 악수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먼저 악수를 건넨다. 검사와 피고인으로 나뉘어서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친구들이 연극반 시절에 배웠던 노래를 함께 부른다. 한 아버지가 쌓아올린 죄악으로 갇히고, 미치고, 떠나고, 죽을 수밖에 없는 형제들이 무대를 떠나는 순간만큼은 하나의 길로 나란히 걷는다. 모두의 무덤을 딛고 외롭게 왕이 된 이가 용포를 입지 않고 허공에 휘날리며 그들을 다시 불러낸다.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상상으로 그들의 삶을 계속 마음속에서 이어나간다.
몇년 전,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처음으로 공연했던 겨울이 떠오른다. 백석과 자야와 사내가 상상으로 눈을 맞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니, 정말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극장의 안과 바깥이 백석의 시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어떤 커다란 것'으로 연결되었던 날이었다. 때때로 공연의 삶이 캄캄하거나 막막할 때마다, 환한 조명으로 극장이 밝아지고, 환한 눈으로 세상이 밝아졌던, 그 눈부시게 행복했던 순간이 커튼콜처럼 다가온다. 그럼 또 어느새 그 눈부신 기억을 등불 삼아, 다시 연습실을 향해 걷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