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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사람이 먼저가 아닌 사회

입력
2021.01.08 18:00
수정
2021.01.08 20: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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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마련 떠들지만 반복되는 아동 학대
중대재해법도 노동자 안전 지키기 부족
정부 국회 진정 죄없는 죽음 막을 뜻 있나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7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적어 놓은 추모 메시지가 놓여 있다. 양평=연합뉴스

7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적어 놓은 추모 메시지가 놓여 있다. 양평=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청와대 청원은 20만명 동의를 넘으면 청와대나 관련 부처의 책임자가 답변을 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까지 답변된 200여건의 청원은 저마다 사연이 절절하지만 2018년 7월의 한 청원만큼 읽기 힘든 경우는 없었다. '23개월 아기가 폭행에 장이 끊어져 죽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청원은 2007년 울산의 한 어린이집 폭행 치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위를 읽는 것만으로 비통하다 못해 절망이나 두려움마저 느끼는 것은 비단 이 사례만이 아니라 중대 아동 학대 사건을 접할 때마다 누구나 마주하는 경험이다. 공분이 끓어오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오래된 사건이라 재수사가 어려운 것'을 알지만 '아동 학대에 대한 나라의, 국민의 인식이 꼭 바뀌어야 하고 관련 법을 꼭 개정해야 한다'며 냈던 이 청원에는 40만명 넘는 동의가 나왔다. 청원 직후 여러 언론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그러나 그 청원이 있고 난 뒤에도 비슷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2년여 만에 아동학대방지책을 마련해달라는 비슷한 청와대 청원이 또 등장했다. 참담하게도 이번에는 16개월 아이가 양부모 폭행으로 숨진 사건이다. 정부가 "체계를 점검하고 보완하겠다"는 답변을 반복하는 사이 7세 이하 아동 학대 범죄는 2배 이상 늘었다.

예방과 감시 체계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아동 학대는 여전히 아이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죽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범죄다. 충격이 강한 만큼 이목을 끌지만 어찌된 일인지 휘발도 빠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온 나라가 대책 마련으로 부산하면서 경찰이나 아동보호기관, 입양기관의 잘못이 되풀이 지적될 리 없지 않은가. 사건이 나면 써먹으려고 준비해 두기라도 한 듯 쏟아내는 법안이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고 폐기될 리 없지 않은가.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건 말뿐 사회가 진정으로 그들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주변의 죄 없는 죽음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대하는지는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아동 학대처럼 산업재해 사고사망도 우리 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참사다. 피해자가 자기방어력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가 아니고, 아동 치사보다 훨씬 대규모로 발생해 심리적 충격이 다를 뿐 인명의 소중함이란 온데간데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국내 산재 사고사망자 숫자는 수십 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위를 고수하고 있다. 1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는 2016년이 969명이었다. 하루에 3명 가까이 숨졌으니 일하러 나서며 '오늘도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길 빌어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산업재해 사망사고 감소 대책'을 내놨고, 그 효과를 보기라도 한 듯 2019년 사망자 숫자는 전년에 비해 116명이 줄었다. 그러나 코로나 확산으로 산업 활동이 위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사고사망자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내년까지 사망자를 500명대로 줄이겠다는 정부 약속은 벌써 빈말이 됐다.

더는 사랑하는 가족을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잃지 않기 위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 않다. 작업 현장이 안전해져야 한다. 노동자는 필요한 안전 장비를 갖춰 안전 수칙을 지켜 일하고, 사업주는 그런 환경을 제공할 의무를 져야 한다. 이런 법 취지를 기업 죽이기로만 받아들인다면 연간 800명 이상 노동자 생명쯤 별것 아니라는 말밖에 안 된다. 산재 사망의 80% 이상이 발생한다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법 적용을 유예·제외한 입법 타협 역시 마찬가지 정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먼저가 아닌 세상에 무력감만 곱씹는다.

김범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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